현재 경주경찰서 맞은편에는 1786년(정조10) 부윤 김이용(金履容)이 중수한 동경관(東京館) 객사(客舍:객관)가 있다. 고려 때 시작된 객관은 왕의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올리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와 외국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아전이 관리를 전담했다. 현재 전주·강릉·고령 등 객관이 남아 있으며, 경주 동경관은 조선건국의 태조 위패를 정청(正廳)에 모셨고, 바로 옆 집경전(集慶殿)에 진영(眞影)을 모신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과 세월의 고단함 그리고 유림의 무지함을 당해 옛 동경관의 원형은 사라지고, 동헌(東軒)-정청-서헌(西軒) 가운데 1952년 서헌만 지금의 자리에 옮겨 세워졌으나, 현재 구)교육청 건물이 동경관 앞을 막고 있어 객관의 존재를 알리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1767년 가을, 함경도 문인 당주(鐺洲) 박종(朴琮,1735~1793)은 스승 담와(澹窩) 홍계희(洪啓禧,1703~1771)를 따라 경주를 찾았고, 객사에 머물며 신라십무(新羅十舞)를 구경하였다. 당시 스승의 아들 홍술해(洪述海,재임1767.5~1768.11)가 경부부윤으로 있었기에 가능하였고, 『당주집』권15,「동경유록(東京遊錄)」에 소상히 적혀 있다. 『삼국유사』에 춤출 무(舞)자가 29번이나 등장한다. 연회와 법회 그리고 신비한 상황에 이어 춤을 추었고, 특히 49대 헌강왕(憲康王) 대에 개운포(開雲浦)와 처용무(處容舞) 그리고 포석정과 어무상심무(御舞詳審舞) 등은 신라춤에 대한 원형이자 대표 춤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조선에 이르면서 오랜 변화를 겪고 재정비되면서 성대한 신라의 음악과 춤 원형은 사라져버렸다. 18세기 박종이 바라본 신라십무의 기록을 통해 신라의 춤과 공연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문화콘텐츠에 활용·개발되길 기원하며, 이에 신라의 10가지 춤동작에 대한 기록을 제시한다. *참고:오상욱,「당주 박종의 동경유록 연구」,『동양한문학연구』43, 2016.신라십무(新羅十舞) 첫 번째 초무(初舞). 기녀 4명이 동시에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혹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4명이 동시에 떨어져 빙빙 돌고 나아갔다 물러갔다하는 것이 모두 절도가 있다.  두 번째 아박무(牙拍舞). 기녀의 수는 초무와 같이 4명이고, 양손에 종을 매달아 양손을 닫았다 열였다하여 절주(節奏)를 맞춘다.   세 번째 향발무(響鈸舞). 기녀의 수는 초무와 같이 4명이고, 양손에 붉은 목패를 잡고 유소(流蘇)를 매달아 절주(節奏)로 삼는다.  네 번째 무동무(舞童舞). 여자아이 4명이 나와 한 쌍은 꽃 삿갓을 쓰고, 한 쌍은 채색관을 쓰고, 서로 마주 보며 춤을 춘다. 다섯 번째 처용무(處容舞). 기녀 5명이 오방색 옷을 입고, 처용의 기이하고 괴이한 형상을 하고, 차례로 들어와서 각각의 방위를 찾아 돌면서 춤추고 끝나고도 이 차례대로 나간다.  여섯 번째 정자(釘子). 당 가운데에 채색북을 두고, 기녀 4명이 양손에 각기 북채를 잡고, 돌면서 북을 쳐 절주(節奏)로 삼는다. 일곱 번째 반도무(蟠桃舞). 기녀 2명이 장대를 잡고, 양쪽에서 들어와서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나가며, 기녀 4명이 각각 반도(蟠桃) 한 떨기를 들고,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히 전진해 상 위에다 반도(蟠桃)를 놓고는 물러나 춤을 춘다. 여덟 번째 주무(舟舞). 채색한 배를 대청 가운데 놓고는 두 여자아이 중 한 명은 꽃삿갓과 철릭[天翼]을 입고, 또 한 명은 채색관을 쓴다. 꽃삿갓을 쓴 아이가 세 번 나팔을 불어서 알리면 곧 배를 타되 두 여자아이가 동시에 탄다. 배에 탄 두 여자아이는 노를 쥐고 배 젓는 모양을 하면, 또 다른 두 아이가 배를 흔들면서 빙빙 돈다. 여러명의 기생들이 또 사방을 에워싸고 노래를 부르고 배를 따라 돌면서 춤을 춘다. 아홉 번째 포구락무(抛毬樂舞). 먼저 공 틀을 대청에 설치한다. 기녀 2명이 공을 쥐고 공 틀 앞뒤로 갈라서서 모두 공 틀을 향하여 춤을 추며 앞으로 뒤로 잠시 물러났다 잠시 나왔다를 번갈아 하면서 여러 번 겨누다가, 마침내 공을 공 틀 속에다 던져 넣은 후에 끝이 난다. 열 번째 황창무(黃昌舞). 한 기녀가 황창의 탈을 쓰고, 전립(戰笠)을 쓰고, 군복을 입고, 처음에는 단검무(單劒舞)를 하다가 나중에는 쌍검무(雙劍舞)를 하는데, 한 기생이 또 이를 상대해 역시 칼춤을 추면서 몸을 거듭 굽혔다 폈다하고 칼을 휘두르면서 돈다. 칼빛이 흰 눈[雪]빛 같아 서로 엇갈려 어지럽게 빛나니 보기에 참으로 늠름하다. 대개 이 놀이는 본래 신라에서 만들어져서 천여 년을 전하여 온 것으로서 사람들은 이를 우리나라 제일가는 춤이라 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학춤으로 끝을 내니 이는 새로 생긴 놀이이다. 먼저 아직 채 피지도 않은 연꽃 한 떨기[나무로 만든다]를 대청 가운데 놓고 두 기녀가 나와 춤을 춘다. 조금 있다가 백학[이것은 오직 남자만 한다]이 들어와 춤을 추는데 이때 두 기녀는 물러나고, 학이 홀로 춤을 추면서 부리로 연꽃의 꽃봉오리를 쪼아서 깬다. 그러면 연꽃 가운데서 머리에 평정건(平頂巾)을 쓴 한 소녀가 나와서 학과 함께 춤을 춘다. 이윽고 학이 부리로 소녀를 몰아 나가면 이 춤은 끝이 난다. 12월 초하루 객사에서 공연이 벌어져 나는 민숙과 가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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