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에는 총 120개소에 비석이 있다. 경주시가 2013년 경주시 일원의 비석·비각 현황조사를 통한 ‘비석현황실태조사 연구 보고서 -경주 비림조성 검토를 위한 비석현황 실태조사 연구 대형사업-’에서 비석 현황은 아래와 같이 집계조사됐다. 감포읍 5개소, 강동면 6개소, 건천읍 4개소, 내남면 11개소, 동천동 5개소, 불국동 3개소, 선도동 8개소, 안강읍 12개소, 양남면 3개소, 양북면 14개소, 외동읍 4개소, 탑정동 6개소, 월성동 13개소, 중부동 3개소, 천북면 1개소, 현곡면 3개소, 황남동 5개소, 황성동 12개소, 황오동 2개소 등 총 120개소(이 중 비각이 있는 곳은 39개소, 지정13개소, 미지정 107개소)다. 지난 25일, 여러 유형의 비석들 중에서(비는 불망비, 선정비, 신도비, 효열비, 창렬비 등의 일반비와 바위나 돌 등에 새긴 명문비, 사당내에 있는 비석, 하마비 등으로 나눌수 있다.) 김환대(경주문화유적답사회 회장, 경주문화연구원장) 원장과 함께 스토리가 있는 6곳의 ‘효열비(孝烈碑, 효행과 열행을 기리어 세운 비)’를 찾았다. 지역의 여러 곳에서 효열비가 다수 남아있는데, 6곳의 효열비에 주목한 것은 이들 비석이 공통적으로 비각은 있었으나 안내판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안내판이 있어도 부식과 훼손이 심해 알아볼 수 없는 곳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각의 보존상황도 나빠 현재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김 원장의 자문과 함께 비와 비각의 현황자료는 ‘비석현황실태조사 연구 보고서(경주시, 2013년)’를 참고했다. -비석과 비각, 여러 상흔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귀중한 유산’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정하고 유교의 지켜야 할 덕목 가운데 효·충 등을 장려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본받게 해서 이상적인 유교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조선 시대 정려를 받는 것은 그 사람의 집안뿐만 아니라 그 고을의 경사였다고 한다. 김환대 원장은 “효열각이든 정려비든 당시엔 최고의 중심가인 도로변이나 왕래가 가장 활발한 곳에 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눈에 잘 띄는 동네의 가장 중심도로변에 있는 것입니다. 그 집안을 드러내기 위해서였고 그것은 집안과 고장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열녀비는 격세지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그 스토리 자체로 흥미와 유교적인 교훈을 주고 있어서 경주의 또다른 스토리텔링에도 역할 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했다. 안강읍 갑산리 효부이씨정려각을 비롯해 안강읍 대동리 열부월성손씨지정려각, 시동 월성이씨정려각, 시래동 열부손씨효부최씨양세정려비각, 외동읍 방어리 열녀각남양홍씨비각, 구황동 이부인 영양남씨 창렬비를 차례로 찾았는데 대부분은 담장이 허물어지기 직전이거나 비가 훼손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잡초가 우거져 비각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고 이는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은 상태임을 방증하고 있었다. 후손들도 이제는 손을 놓고 있거나 책임 부서나 책임의 소재가 불분명해 거의 방치돼 있는 상태로 보였다. 비석과 비각은 이 같은 상흔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와 관련된 유산들이니만큼 최소한의 정비와 안내판을 갖춘다면, 경주지역의 조선시대 역사·문화를 재정립하는 작은 일환이 될 것으로 보였다. -안강읍 갑산리 효부이씨정려각...“아버님을 해치려거든 나를 죽여라” 이 정려각은 갑산1리 대마을에서 68번 국도를 따라 남동쪽으로 내려간 도로 동쪽에 위치한다. 비각의 주변으로는 민가와 농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비각은 일각문과 담장, 비각으로 구성돼 있다. 비각은 일각문의 하부 부재에 일부 파손이 확인되나 미약한 수준으로 전반적인 비각의 상태는 양호하다. 비석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마멸과 손상 흔적이 나타나지만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하다. 다만 담장안쪽과 비각의 내부가 정리되고 있지 않아 이에 따른 관리가 필요하다. 이 비석에는 비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 비석에 대한 궁금증이 일시에 해소돼 비석 주인공들의 당시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스토리를 알게 되니 더욱 정감이 느껴졌으며 안내판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 예로 보여 안내판 내용 전문을 소개한다. ‘건립연대는 조선 인조 초이다. 인조께서 정려하여 건립하였으나 그 후 퇴락하여 1805년 1차 중수하고 1923년 철도 부설로 안해 지금의 현위치로 이건하였으며 1960년 보수후 1991년 중건하다’ ‘효부 이씨는 익재 선생의 8세손인 현감 이세헌 공의 따님이며 정재 선생의 현손인 권관공의 부인이시다. 임진왜란때 병환중이신 시아버님 별제공을 업고 피난길에 나셨다가 왜병에게 들키자 시아버님을 자기의 치마폭에 숨기며 “아버님을 해치려거든 나를 죽여라”하며 대항하니 왜병들이 그 효행에 감복하여 살려주며 “이 마을은 효부의 마을이니 함부로 들어가 동민을 해치지말라”하고 ‘효부이씨지려’라 섬돌에 써두고 떠나니 이로 인하여 이곳에는 왜병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비각에는 옛 비석이 보존되어있다’ -안강읍 대동리 열부월성손씨지정려각...안내판 완전히 녹슬어 안내 기능 상실한 지 오래 대동리 산전동마을에서 박동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 옆에 위치한다. 이 비는 도난당했다가 근래 다시 만들어졌다고 한다. 비각의 주변에는 마을의 집기들이 어지럽게 방치되어 있으며 비각의 외부와 내부 모두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비문은 비신의 정면에 ‘烈婦月城孫氏之旌閭碑’의 비명만이 새겨져 있다. 비석은 근래에 건립된 것으로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다만 비각의 경우는 담장이 무너져 내린 흔적이 있으며 기와에 다수의 파손과 결실이 확인된다. 또한 비각의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으며, 집기가 방치되어 있는 등 전혀 관리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파손이 심한 담장과 비각의 기와에 시급한 정비가 필요하며 더불어 비각의 구역 정비와 관리가 요구된다. 특히 안내판이 완전히 녹이 슬어 아예 안내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돼 보였다. 김환대 원장은 손씨가 시집을 가기 전 남편이 학질이 걸렸는데 연못에 몸을 던져 남편을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면서 이 비석의 스토리를 들려주었다.-시동 월성이씨정려각...비각과 담장 주변 잡초 우거져 있어 진입하기 어려워 시동 샛대일 마을에서 큰대일 마을로 향하는 시동로 향좌측 도로가에 위치한다. 비각의 주변에는 농지와 축사 등이 있다. 비각의 주변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비각으로의 진입이 어렵다. 일각문과 담장, 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문은 비신의 4면 모두 쓰여 있다.  정면에는‘烈婦高興柳文湜妻月城李氏之閭’의 비명이 있으며, 양측면과 후면에는 비석의 건립내력과 건립에 참여한 인물들을 기록했다. 비석은 전체적으로 특별한 파손 없이 상태가 양호하다. 다만 비각의 경우는 일각문과 담장 부분에 일부 손상이 확인돼 정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비각과 담장의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진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비각 주변 구역의 정리와 관리가 필요하다. 이곳에도 안내판이 없었다. -시래동 열부손씨효부최씨양세정려비각...1908년에 건립, 담쟁이 넝쿨로 대부분 뒤덮여있어 효부 최씨와 열부손씨 두 사람을 기린 비다. 안내판이 없어 이곳에 이런 비석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경주-울산 간 산업로에 있는 시래교의 북서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민가 사이에 위치한다. 비각의 담장과 일각문은 특별한 파손은 확인되지 않으나 담쟁이 넝쿨에 의하여 대부분이 뒤덮여 있다. 담장의 내부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으며 민가의 집기가 방치되어 있다. 기와는 지의류에 의한 피해가 심각하며 부분적으로 파손이 확인된다. 비석 좌측면에는 ‘隆熙二年戊申七月日立’이라는 연호가 있어 1908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은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하다. 다만 비각의 경우는 살창과 기와의 파손을 비롯해 목조부재의 노화에 의하여 지붕이 내려앉기 직전으로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 이러한 파손과 더불어 비각의 정리 및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에 따른 긴급보수와 정비가 필요한 실정이다.-외동읍 방어리 열녀각남양홍씨비각...홍일문의 처 경주 김씨와 후처 나주 정씨에 대한 찬문 외동읍 방어리 원동마을 경로당 맞은편에 위치한다. 비각의 좌측으로는 원동마을 안내판과 신조비석이 있으며 주변에는 원동마을 쉼터가 있다. 비문은 비신의 정면에 ‘洪氏一門兩夫人烈行碑’의 비명이 쓰여 있다. 후면과 좌측면에는 홍일문의 처 경주 김씨와 후처 나주 정씨에 대한 찬문과 내력, 비석의 건립에 참여한 인물 등을 기록했다. 비석의 경우 특별한 파손 없이 상태 양호하다. 하지만 비각의 경우 일각문의 파손과 바닥의 부분적인 결실, 천정 및 서까래 보강토의 박락 등이 확인돼 보수조치가 필요하다.-구황동 이부인 영양남씨 창렬비...북한군의 총에 맞아 죽기 직전인 남편 위해 자신의 허벅지살 떼어내 붙여 살려내 이부인 영양남씨 창렬비는 황룡사지 정비가 한창인 구황동 모전석탑지(추정 도림사지) 맞은편인 분황사 주차장 옆길 가장 끝자락에 위치한다. 이 비각에 대한 정보는 김 원장이 밝혀낸 자료다. 한국전쟁 당시 남편 이진우가 북한군의 총에 맞아 죽기 직전 남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살을 떼어내 붙여 살려낸 열녀 남씨를 기려 세운 비각이라고 한다. 원래는 분황사 종무소 출입구 앞쪽에 있었다가 정비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 비각은 비교적 가장 근래에 세워진 비각으로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한 편이다. 김 원장은 “이상, 6곳의 효열비를 둘러봤을 때 경주시가 안내판 설치와 주변 정비라도 했으면하는 바람입니다. 혹은 마을 예산이나 자원봉사 단체에 의뢰해 일부 주변정비를 해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마을 단위로 효열비 책자를 만들어도 바람직하고요”라면서 강원도 고성에서는 효열비만 모아 책자를 발간한 사례도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또 비석에 안내문을 설치해 스토리텔링 작업을 서둘러야하며 일부는 노천에 있어 도난에의 우려도 있다면서 일괄적으로 비의 현황 파악이라도 제대로 해줄 것을 주문했다. 경주시는 현재 비와 비각이 많이 훼손되고 있어 모두 수리하고 싶지만 재정적, 제도적 측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것도 분명 고민해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현재까지는 실태조사에 주력하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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