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화랑의 총지도자인 국선(國仙) 김응렴(金膺廉)은 860년 15세(혹은 18세) 때 헌안왕(제47대, 857-861)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하는 세 사람에 대해 말했다.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해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자이면서도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그 힘으로 사람을 억누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왕은 그의 어짐을 기뻐하며, 사위로 삼고자 두 딸 가운데 한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응렴은 예쁜 둘째 공주에게 이미 마음이 가 있었지만 범교사(範敎師)의 조언을 들어 첫째 공주를 택해 마침내 신라 제48대 경문왕(재위 861-875)이 되고 그 후 둘째마저 왕비로 삼았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경문왕의 세 가지 아름다움[三美]과 세 가지 이로움[三益] 이야기이다.
이 세 가지 아름다움은 오늘 날 우리가 깊이 새겨도 지나침이 없을 만큼 고귀한 명언이다. 6.13 지방선거에서 우리는 국민의 마음이, 시민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충격적으로 느꼈다. 그 많은 공약을 내 걸고 한 표를 구하기 위하여 길거리에 나서서 허리를 깍듯이 굽히거나 큰 절을 하면서 자신의 지지를 호소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당락이 결정 되고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조용하기만하다. 일부는 감사의 현수막을 붙이고 하루 이틀 다시 길거리 인사를 했으나 선거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실감하고 있다. 그 이면에 황성동에서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1위로 당선된 모 시의원 당선인은 수 일째 선거복장을 하고 네거리 뙤약볕에서 연신 머리를 숙이는 모습이 신선한 귀감이 되었다.
처음의 마음 그대로 이어가는 것을 초발심(初發心)이라 한다. 며칠 뒤 내달부터 지방자치단체장과 시,도의원 등의 새로운 임기가 시작된다. 다들 살기 좋은 경주, 발전된 경주를 위해 머슴처럼 일하겠다는 마음을 세우고 목표를 약속한 만큼 기대가 자못 크다. 늘 지금처럼 초발심을 잊지 않고 경주시민을 위하여 일해 줬으면 한다. 예전 전제왕권시대에는 왕이 모든 권력을 행사했다면 오늘 날의 권력은 국민, 곧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시민 한 표, 한 표가 모여서 우리지역을 이끌어 갈 일꾼을 뽑아 놓은 것이다. 그 일꾼은 주인인 시민을 위해서 머슴처럼 일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130개의 조문으로 되어있다. 헌법의 첫머리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되어 있다. 주권은 물론 권력까지 국민에게 있음을 적시한 이 문구를 시민과 당선자가 깊이 생각하고 받들었으면 한다. 헌법 조문의 그 많은 단어 가운데 ‘권력’이라는 말은 단 한 번 여기에만 등장한다. 왜 그럴까? 권력의 근원과 핵심은 바로 국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든 시,도의원이든 교육감이든 지역의 지도자로 당선된 사람들에게는 ‘권한’만 있을 뿐이다. 그 직분에 맞게 주어져 행사할 수 있는 제한된 권리가 주어졌음에도 지난날 우리는 권력을 행사한 숱한 지도자를 보아왔다. 권력을 행사하면 시민은 그 권력에 저항한다.
신라 성덕왕(제33대, 702-737) 때 수로부인을 용왕이 납치해 가자 해가(海歌)를 지어 여러 사람이 부르니 놓아 주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덧붙여 ‘옛말에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능히 녹인다 하였으니, 용이라 한들 어찌 이를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지역의 백성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곱씹어 보면 당시 지역 백성들의 저항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은 선거를 통한 표의 행사가 하나 더 있는 만큼 초발심을 잃은 지도자는 다음번 선거에서 시민의 심판을 받게 마련이다.
어질었던 응렴은 왕이 되고나자 그 전의 마음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던 모양이다. 막상 권력을 잡자 귀는 걸어 잠그고 정사는 돌보지 않은 채 간신배들과 놀아났으리라 짐작된다. 경문왕은 밤마다 뱀과 함께 잠을 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혀를 날름거리는 뱀, 곧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간신의 무리들과 밤낮으로 지냈다는 암시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이 왕대에는 민심이 흉흉해져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나고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갑자기 도림사의 대나무가 바람에 바스락일 때마다 이 소리가 신라 서울에 메아리처럼 퍼졌다. 경문왕은 듣기 싫어서 대나무를 다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었으나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고 계속 소리가 났다고 한다. 왕비는 물론 궁궐에 시중들던 사람들조차 모르던 임금님의 귀에 대한 비밀을 왕의 모자를 만들던 복두장이가 보고 참다못해 도림사 대나무 숲에 가서 외쳐서 그렇다는 설화이다. 이와 비슷한 설화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도 있다. 그리스 신화에 프리지아의 왕 마이더스(Midas)가 당나귀 귀였다는 이야기와 중세 페르시아 책인 이스칸다르나메(알렉산드로스의 책)에 귀가 긴 이스칸다르(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야기가 있으며, 아시아 여러 곳에도 퍼져 있다.
이야기는 한마디로 소통의 부재를 설파하고 있다. 즉 달콤한 한쪽으로만 귀를 열어 둔 채 백성과의 교감을 위한 다양한 의견을 듣지 않은 것을 빗대어 만한 것이며, 모든 정사를 비밀로 부쳐 독단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을 설화로 남긴 것이다. 지난 선거에서 당선한 우리 지역의 지도자는 이 설화의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처신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이 되었거나 역대 최저의 낮은 득표율로 당선이 되었던지 우리 지역의 일꾼인 만큼 반대에 섰던 사람들도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해야 할 것이다. 당선자도 시민의 민의를 겸허히 수렴하여 화합과 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 어질었던 경문왕의 당나귀 귀처럼 되지 않도록 지도자다운 역할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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