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때의 실학파 학자 홍대용은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되려면 긍심(矜心) 즉 뽐내는 마음과 권심(權心) 즉 권세를 쥐고자 하는 마음, 승심(勝心) 즉 매사에 이기고자 하는 마음, 이심(利心) 즉 인간관계에서 절대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만 챙기겠다는 이 사독심(四毒心)부터 버려야 한다고 했다. 옛 신라에 국왕이 허름하게 차려입은 스님에게 오만한 태도로 대하다가 낭패를 당한 일이 있었다. 목민관도 아닌 국왕으로서는 마땅히 가져서는 아니 될 자세였는데…. 효소왕 6년(697)에 망덕사를 완성하고 낙성회가 있었다. 왕이 친히 가서 공양하는데, 행색이 누추한 어떤 비구가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말했다. “소승도 이 재(齋)에 참석하기를 원합니다.” 왕이 그에게 맨 끝자리에 앉기를 허락했다. 재가 끝날 무렵 왕은 그를 놀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파암*에 있습니다.” “이제 어디가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고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 비구는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가버렸다. 허름하게 차려입은 비구가 바로 부처님이었던 것이다. 왕이 놀랍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워 동쪽 산으로 올라가서 그가 간 곳을 향해 멀리서 절을 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그는 남산 삼성곡, 혹은 대적천원이라고 하는 바위 위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고 숨어 버렸다. 사자(使者)가 와서 복명하자 왕은 석가사를 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의 자취가 없어진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곳에 나누어 두었다. 세월이 흘러 일연스님이 이곳을 찾았을 때 석가사와 불무사는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고 하였다. 경주 시내에서 내남쪽으로 6Km쯤 가면 비파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금오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골짜기를 비파골이라고 한다. 비파마을에서 비파골로 1.2Km쯤 올라가면 왼쪽으로 비파를 세워놓은 듯한 바위를 볼 수 있는데 이 바위가 비파암이다. 여기에서 100m쯤 되는 곳에 높은 축대가 있으니 이곳이 석가사 터이다. 계곡 쪽으로 2기의 3층석탑이 허물어져 흩어져 있다. 비파암 뒤쪽으로 또 하나의 절터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불무사 터이다. 절터 아래로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땅에는 전불칠처가람이 있었고 자장법사가 문수보살을, 의상스님은 관음보살을 친견한 적이 있다. 그리고 문무왕 때 분황사의 계집종이었던 광덕의 부인은 관음보살의 응신(應身)이었으며, 경덕왕 때 벼슬이 아간인 귀진의 집에 있는 계집종 욱면은 관음보살의 화신(化身)이었다. 또 이곳 망덕사 낙성회에는 진신석가가 누추한 스님의 모습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시 신라는 불보살이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바로 부처님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래서 불국사(부처님 나라의 절)도 있었던 것이다. *경주 서남산 비파계곡 위쪽에 있는 바위로 동경잡기에 의하면 바위의 모양이 비파와 같이 생겨서 비파암이라고 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15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