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에서는 지난호에 이어 고유섭, 현진건, 황수영, 이병기, 김동환, 오병남, 박화성, 이광수 등 근대 지식인들과 문인들이 경주를 다녀가면서 남긴 여행기(경주 기행문)를 역시 간략하게나마 소개한다. 지면 관계상 축약에 축약을 거듭했으며 여러 지식인들의 누락된 여행기도 다수 있었음을 밝힌다. 2편 역시 조성환 저자의‘경주에 가거든 -한국 근대 지식인을 통해 본 경주(학고방, 2010)’에서 인용하고 발췌했다. 또 저자 조성환 선생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자료수집에의 어려움과 집필의 계기에 대해서도 들어 보았다. -권덕규 (1890~1950)의 ‘경주행(1921년 개벽지에 게재)’ 권덕규는 국어학자로 주시경의 제자다. 조선어연구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신문잡지 등에 수많은 논문, 논술, 수상 등을 발표했다. 한글순회강습 등에 온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는 고증벽이 심했으며 경주에 와서도 고증벽은 계속된다. 김양 묘와 금척의 진위를 따지거나 ‘국모의 발상지’ 알영정에 안내판 하나 없다고 경주인을 교만하다고 질타하기도 한다.-김동환(1901~?)의 ‘경주기행’...불국사를 아테네의 신전에 비유 김동환은 시인으로 아호는 파인이다.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김동환은 누런 보리가 한창일 때 경주를 찾았다. 그는 살진 옥토위에 질퍽한 보리가 내 집 곳간에 벼 천 섬이나 쌓인 양 기뻐하기도 한다. 경주 거리를 걷다보면 ‘보리빵을 파는 점포’가 곳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다보탑과 석가탑을 보며 그 설계의 기교에 넋이 빠진다. 그리고는 불국사를 아테네의 신전에 비기고, 아울러 무술에 뛰어난 화랑, 소리 잘하는 명창 등은 당, 백제, 신라, 고구려에서 온 선수들이 모여 천하장사를 선발하는 ‘신라올림픽대회’를 연상한다. 번성기의 경주는 중국의 장안과 마찬가지로 국제도시였다. 경주를 모티브로 한 김동환의 작품으로는 시 ‘불국사의 동백꽃’, 기행문 ‘백마강과 불국사’, 기행문 ‘가을의 신라 산하’, 기행문 ‘청추의 반월성’, 수필 ‘불국사의 서서 황태자’ 등이 있다. -이병기(1891~1968)의 ‘가을의 경주를 찾아(1927년 조선일보에 실린 연재)’...나도 또한 신라 사람이 되어 이병기는 국문학자다. 호는 가람. ‘황룡사 터에서 서으로 꺾여 오노라면 닳아진 기왓쪽들이 이따금 발 끝에 치인다. 기왓쪽을 주어가며 발맘발맘 온 것이 어느덧 안압지에 이르렀다. 역대의 임금들이 꽃같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이 임해전에 나와서 이리저리 거니시며 내려다보시던 이 못물이 아닌가. 바라보시던 저 반월성도 그대로 남아있지 않은가. 나는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서서 천만 년 전 옛 일을 낟낟히 머리 속에 그려보다가 나도 또한 신라 사람이 되어 오늘날 모든 시름을 잊어버리는 순간에 나는 실거웠다. 나는 행복이었다’이 글은 1927년 조선일보에 실린 연재글 중 발췌한 부분이다.-오병남의 ‘그리운 옛터를 찾아 신라 고도 경주로(1937년 호남평론에 게재)’...‘이름만 들어도 지굿지긋한’포석정 오병남은 일제 강점기 시인이었다. 이 글은 학창 생활의 유일한 날인 경주 수학여행기다. 이 글에서 경주에 대한 작자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표상으로 드러나 눈길을 끈다. 예컨대 ‘이름만 들어도 지굿지긋한’ 포석정, ‘돌을 쳐부수고 싶은 충동을 금치 못한’ 포석정 석거, 참배 요금으로 10전이나 받는 석굴암 입장료, 다보탑의 석사자상을 ‘도적맞은 줄 모르는 이 얼빠진’ 짓 등의 표현이 그 예이다.-박화성(1903~1988)의 ‘그립던 옛 터를 찾아 신라 고도의 경주로(조선일보 1934년 연재 )’...오카모토 유람 자동차를 세내어 박화성은 1925년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 문단’에 등단했다. 이 글은 경주를 답사한 후 연재한 여행기다. 그녀의 경주 여행기는 1933년 9월부터 시작된다. 박화성 일행은 경주 중앙로에 있던 오카모토 유람 자동차를 세내어 나정, 포석정, 계림, 첨성대, 반월성, 안압지, 황룡사터, 분황사, 백률사를 두 시간 만에 돌고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앞에 내려 자동차를 돌려보냈다는 내용도 나온다. 운전기사는 일본인이었다고 한다.-현진건(1900~1943)의 ‘고도순례 경주(동아일보, 1929년 연재)’... 무영탑의 창작 소재로 이어져 빙허 현진건은 대구가 낳은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다. 이 글은 현진건이 동아일보사 사회부장을 맡을 당시 민족사의 고적을 순례할 목적으로 경주 순례에 나서 그 견문을 적은 기행문이다. 경주를 포함한 무수한 역사의 현장을 순례했던 것은 이후 역사소설 창작의 모티브가 됐다. 이는 후에 ‘무영탑(1938~1939, 동아일보 연재)’으로 이어진다. 현진건은 경주의 고적과 유물전설을 순례하고 동아일보에 ‘고도순례 경주’를 13회에 걸쳐 연재한다. 그는 경주 고도순례기에서 문화적 전통을 재발견한다. 아울어 그는 경주를 평야의 도시, 물의 도시로 본다. 이 영감이 무영탑의 창작의 소재가 되었다.-고유섭 (1905~1944)의 ‘경주 기행의 일절(1940년 고려시보에 연재)’...경주에 가거든 경주를 구경거리 삼아 쏘다니지 말고 고유섭은 한국의 미술사학자이자 미학자다. 초창기 한국 고미술사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많은 후학들의 귀감이 됐다. 이 짧은 글에서도 고유섭 특유의 깊고 넓은 사고력, 예민한 감수성, 시적인 운치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여행하려거든 아예 차도 타지 말고 두 발로 직접 땅을 밟아가면서 다니라’고 권고한다. ‘두 발에 채이는 돌부리도 문화, 전설, 설화, 역사가 깃든 돌’이라고 주장하며 경주를 ‘돌의 나라’라고 정의한다. 아울러 신라의 문화는 새기는 문화라고 한다. 그리고 ‘경주에 가거든 경주를 구경거리 삼아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릉을 찾아 문무왕의 정신을 계승하라’고 후학들에게 부탁했다. 현재 그의 시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경주시 양북면 대본리 입구에 서있다.-황수영(1918~2011)의 ‘경주에 가거든(공무원 연금, 1987년)’...황룡사지 연꽃무늬 기와 두 장 10전 초우 황수영은 한국미술사학계의 제1세대이자 불교미술사학의 산 역사다. 황수영은 고유섭에게 미술사를 배운다. 황수영은 석굴암 수리, 경주 대왕암과 서산 마애불상 발견, 익산 왕궁리석탑 발굴 등 현대 문화재의 발견과 새로운 주목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에 가거든’ 이 외에 ‘경주 수학여행의 감명(경복고교지 1981년)’은 황수영이 다녔던 경성제2고보 3학년때의 경주 수학여행 기억을 되살려 모교지에 실은 글이다. 황수영은 1933년 봄 경성에서 밤차를 타고 새벽에 대구역에 내려 협궤열차를 타고 경주역에 내렸다. 당시 협궤열차는 흔히 ‘장난감 기차’라고도 불렀는데 너무 느려서 고갯길을 오를때는 학생들이 아예 내려와서 기차와 경주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황룡사지에서는 아이들이 땅에서 파낸 연꽃무늬 기와 두 장을 10전을 주고 사서 모교의 지역교실에 기증했다.-이광수(1892~1950)의 ‘오도답파여행(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백률사가 지금은 기초석까지 반이나 무너졌다 ‘여관에 돌아와서 세 시간쯤 쉬고 자전차로 일행은 다시 고적 탐방의 길을 떠났다. 명활성, 남산성, 석탈해왕릉, 백률사, 김유신 묘와 경주 박물관을 보려 함이다. 우선, 금강산 백률사에 이르렀다. 백률사는 지금 아주 작은 절이다. 본래는 금강산 비탈 사면석불의 가숙소가 되었던 굴불사와 함께 명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초석까지 반이나 무너졌다’ 이 기행문에서 이광수는 전국 5도의 각 지방 중 마지막으로 경주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명승고적, 인물, 자연환경, 문물, 산업, 풍속 세태를 관찰하고 이를 사실적으로 기록했다.-‘경주에 가거든 -한국 근대 지식인을 통해 본 경주’저자 조성환...“옛부터 현재까지의 경주 관련 담론을 시기별로 정리한다면 다양한 경주 관련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 저자는 1991년부터 2007년까지 경주에서 16년간 살았다. 1991년~2005년 경주 서라벌대학 전임, 부교수, 조교수를 역임했던 시기였다고 한다. 이 책 제목 ‘경주에 가거든’은 고유섭 선생의 글 ‘경주 기행의 일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저자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글 가운데는 금강산 다음으로 경주에 관한 글이 많은데, 이는 당시, 경주엔 볼거리가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접근이 편리한 이유도 있어서입니다. 당시 경편철도가 개통돼 서울-대구-경주, 혹은 부산-울산-경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조선총독부에서 수학여행을 정책적으로 장려하고 홍보하면서 그 기록물도 많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근대의 경주 위상과 표상을 대변하는 자료를 집대성해 다양한 종류의 글들을 수합하게 된 과정에 대해선 “경주가 낳은 문인 최치원 선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중국 학자들의 최치원 연구 논저를 모아 번역해‘중국의 최치원 연구(도서출판 심산, 2009, 1116쪽)’를 간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일제강점기에 생산된 경주 관련 글들을 모아 분석하기 시작했지요. 제가 16년 동안 경주에 살면서 졌던 부채를 갚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답했다. 그는 또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특별히 선정 기준은 두지 않고 경주에 관련된 글이면 모두 수록하려고 했습니다만 자료 입수난과 책의 부피로 많이 빠져 있는 상태”라면서 안타까워 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자료 찾기였습니다. 대부분 일제강점기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된 것인데, 글자가 희미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실리지 않은 경주 관련 글이 훨씬 많습니다. 이런 작업은 개인적으로 추진하기엔 힘이 부치거든요. 경주시나 경주 관련 연구기관에서 옛날(예를 들면 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부터 현재까지 나온 경주 관련 담론을 시기별로 정리해서 자료집으로 내놓으면 후학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것으로 다양한 경주 관련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스토리 없는 외국인 위주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것은 낭비라고 봅니다. 차라리 우리 선조가 남긴 글들을 모아서 정리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면서 이 책을 집필하는 데 있어 어려웠던 점들과 우리가 새겨들을 대목도 짚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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