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포에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시가지 좁은 도로 양쪽으로 2층 적산가옥들이 아직도 듬성듬성 남아있습니다. 이들 적산가옥이 모여 있는 감포 안길 가운데 ‘구, 신천탕’이라는 안내표지판이 굴뚝이 유난히 높은 건축물을 가리킵니다. 이왕이면 몇 년도에 지어진 건축물인지 간단한 설명이 더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젓갈저장창고(역시 일제강점기 적산건물)를 지나자마자 길다란 굴뚝이 우뚝 서 있는 오래돼 보이는 건축물은 일제강점기 지어진 대중목욕탕이랍니다. 대중목욕탕이 많이 없었을 당시, 수 십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목욕탕은 동네 근처에선 유일한 목욕탕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손님이 많아 주인은 많은 돈을 벌어 호텔도 지었다고 하네요. 내부구조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주민이 전했습니다. 수도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불을 때서 우물물을 퍼다가 끓여서 목욕탕물로 사용했다고 하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주시의 동단에 위치한 감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군에 편입되어 양북면이 되었으며 당시 감포 인구 3000여 명 중 700~800명이 일본사람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수산업 관련 분야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1937년 감포읍으로 승격했고요. 감포는 일본인들에 의해 항구가 개발되면서 일본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바다 전망이 좋은 곳이나 번화가, 넓은 터를 차지하고선 상점, 통조림 공장, 젓갈 공장, 제염 공장, 기선저인망어선 같은 회사 등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해나갔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적하고 조용하던 감포가 이처럼 불야성을 이루게되니 자연스럽게 돈이 몰리게 됩니다. 이발관, 술집, 요정, 유곽, 식당, 여관 등이 성업을 이뤄 감포는 그야말로 호황을 이뤘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목욕탕도 이 시절에 지어진 것 같습니다. 해방 후 점차 감포가 낙후되고 주목을 받지 못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발업자들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반갑기도 합니다. 이 지역의 역사성이 살아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오래전부터 경주에 있는 근대 건축물을 최대한 보존해야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감포의 근대사를 간직한 가옥들은 겨우 100년 역사를 넘겨 고대 신라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근대사까지 아우르는 우리들의 안목이 절실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개발이냐 보존이냐 정도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향후, 감포읍과 감포항이 역사투어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감포읍과 감포항 투어를 통한 지역 역사성을 재발견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큰 안목과 근대에 대한 역사인식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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