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귀(詠而歸)’는 『논어』「선진편」에서 공자가 만약 누군가가 너희들을 알아주면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에 증점(曾點)이 말하길 “봄이 되면 봄옷으로 갈아입고 젊은이 대여섯명과 동자 예닐곱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의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올까 합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에서 가져온 말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의미한다. 영귀(詠歸)·풍영(風詠)·이호(二乎) 등도 같은 의미를 내포하며, 유학을 숭상한 조선의 건축물에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전남 곡성군 옥과면 죽림리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를 배향한 영귀서원이 있고, 정자로는 경북 의성군의 사휴자(四休子) 김광수(金光粹,1468~1563)와 전남 화순군의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1845~1910) 등의 영귀정이 있다. 또 풍광이 좋은 곳에 영귀대를 각자(刻字)한 함양 화림계곡과 대전 이사동의 봉강정사(鳳岡精舍)의 영귀대 편액과 경북 칠곡군 낙동강변 자라산 짚동바위와 경남 거창군의 영월정의 영귀대 등이 있다. 경주부도 역시 서악서원의 영귀루·독락당의 영귀대·양동마을의 영귀정·문천의 영귀정 등 다수의 건축물이 존재하는데, 특히 건축물은 배향 인물이 갖는 상징성과 깊은 상관성이 있으며, 지역의 학문과 사림들의 정치·사회활동의 중심 역할까지 하였다. 이처럼 ‘영귀’라 편액한 서원·정자·대가 많음은 ‘영이귀’에서 주는 암묵적 메시지를 체득하고자 하는 수신(修身)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영주의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36) 풍기군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고려말 유학을 도입한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사당을 짓고, 1543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하고, 1548년 퇴계 이황이 사액(賜額)을 요청해, 1550년(명종5) 소수서원이라 사액 받았다. 게다가 1584년(선조17) 보은군의 주민들이 고을 현감을 지낸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1506~1559)의 음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김굉필-조광조-성제원-류우(柳藕)의 학문적 도통을 이었는데, 이것이 향사(鄕祠)의 시작이 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에 향사(鄕祠)와 서원 등이 건립되면서 경전의 글귀를 인용해서 수신(修身)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으나, 이후 숙·경·영·정조 대를 거치면서 100여 개의 향사가 생겨났고, 서원은 더욱 증가되어 한때 서원 설립 허가제와 첩설 금지령(疊設禁止令)이 내려질 정도로 원사정재(院祠亭齋)가 무분별하게 세워졌다. 다만 교육기능이 포함된 순기능도 있었지만, 파벌중심의 정치활동적 기반이 되는 역기능도 있었기에. 훗날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려 많은 수의 서원 등을 훼철하였다. ◆서악서원은 김유신(金庾信)·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 1561년(명종16) 경주부윤 구암(龜巖) 이정(李楨,1512~1571)이 지역유림의 공조로 김유신의 위패를 모셨고, 1563년에는 신라의 문장가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를 차례로 추가 배향하였다. 『고운집(孤雲集)』「가승(家乘)」을 보면, “병술년(1646)에 이민환이 부윤으로 있을 때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고, 묘제를 동향으로 하여 홍유후와 개국공과 문창공을 차례로 모두 향사(享祀)하였다”기록한다. 『구암집(龜巖集)』에 항재(恒齋) 정종영(鄭宗榮,1513~1589)은 서악서원에 걸린 이정의 시에 차운하길, “함께 서악서원의 선비를 찾아 말을 주고받으니, 기수 가의 영귀의 명성과 똑같네(共訪靑襟酬且問 依然沂上詠歸名)”라며 서악서원에 모인 선비들의 기상이 증점과 같다고 읊조렸다. ◆회재 이언적 선생은 42세에 비로소 독락당을 짓고, 그 속에서 읊조리고 낚시하면서 분잡한 세상일을 사절하고, 방안에 단정히 앉아 도서를 정밀히 연구하였다. 시내 앞에는 탁영대(濯纓臺)·징심대(澄心臺)·관어대(觀魚臺)·영귀대(詠歸臺)·세심대(洗心臺)라 명명하였으니, 굴원의 「어부사」에 등장하는 탁영과 『중용(中庸)』의 연비어약(鳶飛魚躍)과 논어의 ‘영귀’ 등은 무위자연의 삶과 성리학적 사유를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동마을의 영귀정은 회재선생의 젊은 시절 휴식공간 겸 학문을 강마하던 곳으로, 당시엔 초가집 형태였으나, 1778년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대문에 걸린 「이호문(二乎門)」은 ‘浴乎沂 風乎舞雩’에서 乎자가 2번 들어간 것에서 연유하며, 『회재집』에 「병기등영귀정(病起登詠歸亭)」·「등영귀정(登詠歸亭)」 2수가 전한다. ◆지금은 사라진 문천의 영귀정은 사마소의 별칭으로, 유생들이 강학하던 사마소는 문정(汶亭)·문양정(汶陽亭)·병촉헌(炳燭軒)·풍영정(風詠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화계 류의건과 활산 남용만의 기문을 통해 옛 영귀정의 일을 자세히 기록하였고, 증점처럼 회재처럼 누구나가 영귀정에 올라 그러한 기상을 얻고자 ‘영귀’라 편액하였다. 비록 단편적인 경우지만 경주부에 ‘영귀’편액이 많은 이유가 회재선생을 제외하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회재학이 확산된 점 역시 간과하기에 불가하니, 후손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