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공범자
-김상미
어딜 가도 TV 화면이 흘러나온다. 식당에서도, 은행에서도, 관공서에서도. 도서관 휴게실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기차 안에서도, 거리 곳곳 구석구석, 가는 곳마다 예외 없이 잔인하게 따라붙는다. TV 없이 살아도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인정사정 없이 달라붙는다. 자신이 불티나게 성업 중이란 걸 과시하며 거침없이 반복하고 반복하며 흘러나온다.
벗어날 수가 없다. 제발 TV 좀 꺼주세요! 외치면 이상한 사람, 낙후한 이방인 취급을 받는다. 아무리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TV 화면은 TV 소리는 온몸, 온 마음을 무례하게 침범한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어떻게 견디며 사는지 손톱만큼도 모르면서 그걸 다 아는 것처럼 판단하고, 넘겨짚고, 떠들어댄다.
TV를 보고 있으면 사람만큼 단시간에 서로 나빠지고 좋아지기 쉬운 것도 없다. 마치 이 지구 상에 사는 70억여 명의 인구가 TV라는 배에 실려 아무것도 모른 채, 하염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생각할 틈도 없이, 백퍼센트 비극처럼 백퍼센트 희극처럼 떼 지어 너도 나도 공범자가 되어 눈먼 공범자가 되어 끝없이 하염없이….
-TV 없이 생각하는 연습TV만큼 우리의 시각과 마음을 빼앗는 기기가 또 있을까? 어디를 가도 TV는 우리를 따라붙는다. 은행은 물론 심지어 임플란트 시술을 기다리고 있는 치과 의자에도 TV화면이 다정하게 속삭인다. 일상에서 해방되어 여행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도 여지없이 TV는 우리를 유혹한다.
TV는 어디든 성업 중이다. 반복하고 반복하며 끊임없이 우리를 세뇌한다. 별 것 아닌 일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여럿 나와 “판단하고, 넘겨짚고, 떠들어”대고, 우리들은 속수무책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다. 이제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무의식까지 갉아먹는다. 시인은 TV라는 자본주의의 시스템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지배하는 양상을 ‘흘러나온다’, ‘따라붙는다’. ‘달라붙는다’, ‘침범한다’라는 네 개의 동사로 표현한다.
가히 ‘TV 독재’라 할 만하다. 그 독재 앞에서 “TV 좀 꺼주세요! 외치면 이상한 사람, 낙후한 이방인”으로 공화국에서 즉각 추방된다. 독재자가 뻔히 우리 눈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그 독재가 좋아 웃고 떠들고 흥분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알고 보면 이 독재의 ‘눈먼 공범자’다.
그렇다. 이러다가는 “70억여 명의 인구가 TV라는 배에 실려 아무것도 모른 채, 하염없이 어디론가 흘러가” 버릴 것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그날’이 오기 전에 TV 없이 생각하는 연습이나 좀 하라고 나직이 권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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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