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몹시 가물었다. 보문호는 물론 경주시민들의 식수원인 덕동호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서 날씨가 순조롭다.
중국 한대(漢代)의 사상가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에 이런 구절이 있다.
‘太平之世 五日一風 十日一雨 風不鳴枝 雨不破塊(태평지세 오일일풍 십일일우 풍불명지 우불파괴)’ 태평한 시대에는 5일에 한번 바람이 불고, 10일에 한 차례 비가 와야 하는데, 바람은 나뭇가지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비는 흙덩이를 부수지 못할 만큼 내려야 한다는 것으로 요즈음의 날씨가 바로 이에 해당된다.
다행히 오늘은 봄의 불청객인 미세먼지도 없어 나들이하기가 참 좋은 날씨이다.
망덕사지는 사천왕사지 남쪽, 배반동 964번지에 있다. 통일전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화랑교(남천다리)에서 내려 동쪽으로 내를 따라 둑을 걷다 보면 왼쪽 논 가운데 조그만 숲이 보이는데 그곳이 망덕사지이다. 진입로가 없어 논두렁을 타고 들어가야 한다.
사적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망덕사지는 금당지를 중심으로 그 앞쪽 동·서 방향으로 목탑지가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금당지 남쪽으로 중문지가 있고, 금당지의 북쪽으로 강당지가 있으며 이들을 둘러싸는 회랑지가 있다. 금당의 좌우로는 익랑지가 있으며 중문지의 남쪽에 계단터가 있고, 그 서쪽에는 보물 제69호인 당간지주가 있다.
2013년에는 정비를 위하여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강당지의 위치를 추가로 확인하였으며, 고려시대 초기까지 사찰이 존속하였음이 밝혀졌다.
망덕사의 금당지는 과거에 경작으로 인하여 초석 등 유구가 교란된 상태인데 초석 주변으로 기와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다. 금당은 남아있는 초석을 기초로 하여 살펴보면 정남향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초석의 배치 상태를 살펴보면 북편 뒤쪽에 일렬로 6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고, 그 앞에는 4개의 초석이 다소 교란된 채 있으며, 다시 그 서쪽 전면에 또 하나의 초석이 있다. 동·서목탑지는 중심에 위치한 심초석을 기준할 때 33m의 거리를 두고 좌우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마침 어제 저녁에 온 비로 심초석 사리공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다. 당시의 화려한 사찰의 모습을 상상하며 들여다보니 무심한 푸른 하늘뿐이었다.
동탑지는 초석의 일부가 유실된 것 외에는 양호한 편이다. 발굴조사 결과 목탑의 사방 기단을 구성하는 장대석렬과 계단지가 확인되었다. 팔각으로 된 심초석 중앙에 위치한 사리공의 형태는 이중으로 된 사각형이다. 1단 부분은 사리공을 덮었던 뚜껑이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탑으로 올라오는 계단은 3곳에서 확인이 되고 있는데 계단석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서탑지는 경작 등에 의해서 기단의 대부분이 유실되어 현재 심초석 1매만 노출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남쪽에서 3매, 북쪽에서 1매 등 모두 4매의 지대석이 확인되었고, 심초석은 동탑과 같은 팔각형인데, 사리공의 형태는 방형으로 동탑과 같이 2단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남쪽 지대석에서 계단과 연결되는 부분이 확인된다.
동·서 탑지 남으로 중문지가 있고 다시 그 남쪽으로 계단의 흔적이 있다. 이 계단을 통하여 사찰 안으로 출입했을 것이다.
추정되는 계단 주위로는 발굴이 되지 않아 명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윗부분을 도드라지게 둥글게 장식한 팔각석주와 소맷돌로 추적되는 삼각형의 석조물들이 흩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