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동기 중에 충청도 출신이 하나 있었다. 익히 예상했다시피 그 친구는 엄청 느리다. 하는 행동도 느릿하고 말은 더더욱 느긋했다. 사회에서 그랬으면 여유롭다는 소리를 들었겠지만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좋은 평가보다는 그 반대가 많았다. 성격 급한 경상도 출신의 고참은 기분 좋을 때면 충청도 양반이라며 허허대지만, 상관으로부터 한소리라도 들은 날에는 그놈의 ‘멍충도 **’ 때문이라며 괜히 몽니를 부린다.
인터넷에는 지역별로 말 빠르기를 테스트한 재미난 글들이 많다. 돌아가셨습니다(표준어)를 경상도에서는 ‘죽었다 아임니꺼’ 하고 전라도에서는 ‘죽어버렸어라’ 하지만 충청도는 ‘갔슈~’한다. 충청도 말이 절대 느린 게 아니다. 괜찮습니다(표준어)라는 말을 경상도에서는 ‘아이라예’, 전라도에서는 ‘되써라’ 하면 충청도는 ‘됐슈’ 한다. 오히려 메시지 분명하고 전달이 매우 간결하다. 이래도 충청도를 여전히 멍청도라고 우기면 심화 문제 들어간다. 표준말로 ‘이 콩깍지는 깐 콩깍지야, 안 깐 콩깍지야?’ 성질 급한 경상도 사람들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충청도 양반이 말한다. ‘깐겨 안깐겨?’
느릿느릿 충청도 사람도 이 정도로 말이 빠른(?)데, 주변에 ‘빨리빨리’ 문화를 찾기란 식은 죽 먹기다. 어디건 간에 아파트 앨리베이터에서는 ‘닫힘 버튼’만 닳아서 반질거린다. 공항에서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탑승객들은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자리에 앉아 가만히 기다리는데 짐을 내리는 사람, 이미 좁은 복도에 줄을 서 있는 사람은 죄다 한국 사람들이다. 필자라고 다르지 않다.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가만히 서있지 못하고 항상 걸어 올라간다. 바로 옆에 계단이 있는 데도 말이다. 여유를 찾으러 나간 외국 어느 온천이나 해변에서도 혼자 바쁜 사람은 전부 한국 사람이다.
우리는 왜 이럴까? 도대체 언제부터 바빴고 언제부터 시간에 쫓기듯 살아왔을까? 정말 희한한 건, 민요든 국악이든 우리 음악은 결코 빠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니 느려도 너무 느리다. 살면서 주변에 국악 좋아하는 사람 하나 못 봤다. 여러 이유야 있겠지만 누구나 즐기는 우리 가요나 서양의 팝송과 달리 우리 전통의 소리는 일단 속도부터가 시쳇말로 ‘고구마’다. 시간이 정지한 듯 느린 템포는 서양의 메트로놈이라 불리는 박자기로도 측정이 안 되는 속도란다. 서양 메트로놈 수치로 가장 느린 하한선의 눈금이 40인데 가령 〈이삭대엽〉의 템포는 25정도라니 어디서나 ‘빨리빨리’를 외치는 우리의 직계 선조님들이 즐기시던 노래 맞나 의심마저 든다.
어떤 학자들은 그 이유로 기후풍토적인 이유를 들기도 한다. 또 다른 이들은 문화적 배경이나 민족적 기질을 들기도 한다. 서울시립대 음대교수와 국립국악원 원장을 역임한 한명희 선생은 흥미롭게도 사람의 몸에서 힌트를 찾는다. 동양은 폐부(肺腑)의 ‘호흡’을, 서양은 심장의 ‘박동’을 중시한다고 본다. 하기사 예전부터 한국인은 명상을 하거나 심신을 수련할 때 호흡을 중시해 왔다. 죽음의 완곡한 표현인 ‘숨이 끊겼다’거나 호흡이 가쁠 때 쓰는 ‘숨 넘어간다’는 표현도 한국인에게 있어 그만큼 호흡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전통음악도 따라서 차분하고 깊은 호흡의 주기에 맞추다 보니 자연스레 느릿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빠른 비트의 음악은 호흡이 가쁜, 아주 비정상적인 상태일 테니 말이다.
반면에 서양음악은 규칙적인 심장박동에 템포를 맞추다 보니 우리 음악에 비해 현저히 빠르다. 템포를 계측하는 최소 단위를 펄스(pulse)라고 하는데, 이게 영어로 맥박이란 뜻이다. 실제 서구인들이 평안함을 느끼는 보통 빠르기인 모데라토(moderato) 속도는 심장 박동수와 비슷하다는 것도 신기하다. 깊고 차분한 호흡을 중시해왔던 우리 선조들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어떨까 싶다. 경박하게 본인 호흡도 놓치고 있냐고 불호령을 치실지, 아니면 뭐든 빨리해야만 버텨나갈 수 있는 현실을 짠해 하실지 궁금하다. 충청도 군대 동기는 지금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도 물론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