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陽宅)은 살아있는 사람의 집이고, 죽은 사람의 집을 음택(陰宅) 또는 유택(幽宅)이라고 한다. 묘지는 죽은 사람의 유골(遺骨)이 편히 쉬고 있는 집으로 보아야 한다. 음덕(陰德)이 서려 있는 조상의 유택을 수호하고 관리하는 것은 자손으로서 당연한 도리이다.
언제부터인가 조상의 유택을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산 사람이 편리한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묘를 관리하는 것이 힘이 든다고 하여 조상의 유택을 파묘(破墓)하여 화장을 하는가 하면 유골을 한군데 모아 집묘(集墓)를 하여 관리하는 가문이 늘어나고 있다. 조상께서 섭섭해 하실 것만 같다. 그런데 신라 때 왕릉을 조성하다가 그만 둔 특이한 사례가 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남쪽으로 135m 떨어진 이 일대는 오래 전부터 석재 유물이 지면 위에 노출돼 있었다. 학계에서는 신문왕릉이나 성덕왕의 왕비이자 경덕왕의 모후인 소덕왕후릉, 민애왕릉 등과 비슷한 급의 폐왕릉지일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에 대해 고(故) 이근직 교수는 소덕왕후 또는 남편이 화장한 후 산골한 까닭에 합장할 능이 존재하지 않았던 효성왕비이자 경덕왕의 형수인 혜명부인 김씨의 능일 가능성을 피력한 적이 있다.
지난해 성림문화재연구원이 이곳을 발굴하면서 탱석, 면석, 지대석, 갑석, 미완성 석재 등 신라 왕릉에서 주로 사용되는 유물과 그 주변으로 8-9세기의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도로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 발굴된 석재 대부분은 주로 신라 왕릉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갑석과 지대석, 면석과 탱석으로 추정해본 왕릉의 지름은 약 22m로, 내남 부지에 있는 전(傳) 경덕왕릉(재위, 742-765년)과 비슷한 규모이다. 조사 결과, 왕릉 관련 석재 다수가 미완성으로 출토된 점, 후대에 조성된 8-9세기 건물지 시설에 재활용된 점, 석실 내부를 만들기 위한 부재가 확인되지 않은 점, 탱석의 십이지신상이 잘려나간 점 등 여러 정황으로 판단할 때, 당시 왕을 위하여 사전에 왕릉을 준비하던 도중 어떠한 사유인지 축조공사를 중단하였던 가릉(假陵) 석물로 추정된다. 가릉은 왕의 죽음이 임박해 사전에 능침을 만들어 두는 무덤을 말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가릉 주인공은 출토된 십이지신상 형식으로 볼 때,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재위, 738-742)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에 제34대 효성왕을 사후 법류사 남쪽에 화장하고 유골을 동해에 뿌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다.
효성왕 생전에 능을 조성하다가 왕의 유언, 또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만 둔 것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 이 가릉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이를 발굴한 결과 8-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도로(너비 16-17m) 등이 확인됐다.
이와 함께 연화보상화문(蓮花寶相華文)수막새, 귀면와(鬼面瓦, 도깨비기와),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과 ‘정원사(鄭元寺, ‘鄭’자는 확실하지 않음)’명 명문기와 등 유물 300여 점이 출토됐다. 이 유물이 출토된 건물지는 일반적으로 신라왕경에서 확인되는 주택이나 불교 사원 건축과는 차이가 있어서 관청이나 특수한 용도의 건물로 추정된다.
불교 관련 유물은 나오지 않고, 관청명으로 추정되는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이라고 적힌 명문기와 등의 유구로 봐서 신라 왕경의 행정 조직 중 하나로 알려진 습비부(習比部)와 관련된 관청이었을 가능성도 추정해볼 수 있다. 습비부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제3대 유리왕 9년 ‘명활부를 습비부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도로 유구는 현재까지 신라왕경 내 조사된 다른 도로보다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잘 만들어졌는데, 왕경의 남북대로와 동서대로의 너비가 약 16-17m 정도인 점으로 볼 때, 왕경의 방리(坊里)구획에 의해 연결된 도로이거나 황복사지 사역(寺域)이나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대형의 미완성 석재를 이동하기 위한 특수 목적으로 가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 학계에서는 앞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축조과정과 능원제도를 비롯한 신라왕경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