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교촌마을 입구 맞은편에는 문정(汶亭)·문양정(汶陽亭)·병촉헌(炳燭軒)·풍영정(風詠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사마소(司馬所)가 자리한다. 1711년 경주부윤 남지훈이 중간한 『동경잡기』에 의하면 “사마소는 향교의 남쪽 문천(蚊川) 가에 있다. 언제 창건했는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주춧돌과 섬돌만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기록하며, 동고(東皐) 이덕록(李德祿,1677~1743)·손경걸(孫景杰) 등이 1741년에 다시 세워 풍영정이라 하고, 1762년 부윤 홍양호가 사마소라 편액하였으며, 이후 유림과 교촌의 세력에 힘입어 여러번 보수돼 오늘에 전한다.
사마소에 관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로 1760년 영귀정(詠歸亭) 편액에 얽힌 사연이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의 글에 드러난다. ‘영귀(詠歸)’는 『논어』선진편에서 공자가 만약 누군가가 너희들을 알아주면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에 증점(曾點)이 말하길 “봄이 되면 봄옷으로 갈아입고 젊은이 대여섯명과 동자 예닐곱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의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올까 합니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에서 빌린 말로, 향교의 대성전에 공자를 모시고, 문천과 기수의 결합으로 경주부의 유생들도 자연의 도를 느끼고자 다음과 같이 정자를 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문천의 영귀정과 양동의 영귀정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당시 화계선생의 사위인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깊은 글을 남겼다.
남용만과 이돈항(李敦恒,1734~1781)이 거듭 화계선생께 정자의 기문을 여쭙고, 기억을 더듬어 정자의 전말을 기록하였으니, 사마소의 옛 이름인 영귀정 이야기를 들어보자.
『花溪集』卷9,「記.詠歸亭記」 문천(汶川)가에 오래전 영귀정(詠歸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과거에 합격한 유생들이 유식(遊息:편하게 쉬는 공간)하는 곳으로, 어느 때에 지어졌고 언제 헐리었는지 모르고, 그 땅은 비었는지가 백여 년이 되었다. 임인년(1722) 중건을 논의하여 먼저 정자의 북쪽 작은 땅에 작은 공관(公館)을 세우고, 때때로 그곳에서 쉬었다. 하지만 정자는 여러해 진척이 없다가, 경신년(1740) 봄에 이르러 비로소 경영을 시작해, 다음해(1741) 초여름에 공사를 마쳤으니, 영조임금께서 재위에 오른지 17년 되는 해이다. 상사(上舍) 이덕록(李德祿). 손경걸(孫景杰)이 실제로 일을 주관하여 완공하였고, 이에 문천 가에 다시 정자가 세워져 오늘날 여러 유생들이 유식하는 마땅한 곳이 되었다.
장차 정자의 편액을 걸려고 하니, 누군가는 옛 이름을 그대로하자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이름으로 고치자 하였으나, 오랫동안 정하지 못하였다. 마침 금년(1760) 봄 남용만이 정자의 일을 알고는 “이 정자는 맑은 물에 임하고 옛 성이 곁에 있어서, 마땅히 목욕하고, 바람맞고, 읊조리기에 좋고, 기수(沂水)가의 정취가 있어 예나지금이나 한결같이 경치를 감상하는 곳으로, 지금의 정자는 바로 옛적의 정자와도 같습니다. 영귀로 이름한 것을 하필 고치려합니까?”라 하였다. 마침내 영귀로 편액하고 나에게 정자의 전말을 기록해줄 것을 부탁하며 “이 정자가 오래된 만큼 옹(翁)께서도 보았으니, 정자를 세운 일에 대해 옹만큼 아는 분이 없습니다. 옹께서 그 일을 기록하십시오”라 하기에, 나는 “알겠네” 하였다.
얼마후 남용만이 그 맡은 일을 교대하고, 이돈항이 그 일을 대신해 남용만의 뜻과 같이하고자, 다시 나에게 청하였다. 나는 사물의 흥망성쇠는 정해진 운명이 있으나, 옛 정자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한 시절의 명승지로 어찌 정자에 오른 벼슬아치가 몇 사람이었겠는가? 하지만 한번의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겪고 민멸되어 전하지 않으니, 정자 역시 훼손되어 부서진 기와와 무너진 담장이 다시는 남아있는 것이 없어 풍류를 아는 자들 가운데 마음 아파하고 탄식한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다행히 좋은 때에 다시 세워져 백여년 황폐한 땅에 하루아침에 새롭게 하였으니, 어찌 그 기간에도 정해진 운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은 다만 마땅히 이곳에서 바람맞고, 목욕하고, 읊조리며 이곳에서 돌아가야 할 것이니, 공자께서 요순의 기상을 좋아하고 공경한 것을 생각하여 태평한 성인의 세상과 인재 양성의 즐거운 뜻을 져버리지 않는 것이 옳다.
비록 그렇더라도 나는 이곳에 대해 마음이 없을 수 없으니, 정자가 완성된 지 지금으로 19년에, 이덕록·손경걸 두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이 정자에서 노닌 주변의 여러 장로들과 한때의 무리들 모두가 다 죽고 없거늘, 하물며 천백년에 있으서랴? 정자가 다시 무너져 폐허가 될 줄 알 수 없지만, 훗날 지금을 보는 것 역시 지금 옛것을 보는 것과 같으니, 오늘날의 일을 누가 다시 알겠는가? 이 때문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기수 가의 정취와 시냇물과 산의 승경은 이 정자에 오르는 자라면 마땅히 그것을 알 것이니, 꼭 기록하지 않고 또 마땅히 기록하지 않으며, 다만 정자 세워진 연·월과 일을 주간한 인원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