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는 두 종류의 사자춤이 있었다. 그 하나는 최치원 선생이 지은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 중 신라오기(新羅五伎)에 등장하는 2인 1두가 추는 사자무인 ‘산예(狻猊)’다. 다른 하나는 일본에 전하는 악서(樂書)인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에 기록된 ‘신라박(新羅狛, ‘박(狛)’은 ‘짐승이름 박’자)’이라는 1인 5두(한 사람이 추며 머리가 다섯인 사자춤) 사자무가 있었다. 특히 1인 5두 유형의 신라박은 세계에서 유일한 사자춤의 형태로 알려져 있다. 이 신라박은 불과 몇 년 전부터 비로소 조금씩 알려져 왔다.
전 세계적으로 문화유산 활용에 방점을 찍는 것이 큰 흐름임에도 경주시는 문화재 관리보존에만 치우쳐 있는 편이다. 신라 사자춤은 경주에서는 매우 중요한 신라의 공연 콘텐츠임에도 지금까지 도외시 돼 온 것에 주목하면서 공연 문화나 연희가 부족한 경주에서 지금이라도 이를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용목 신라가면무연구소장(55·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이수자)을 만났다. 당나라에까지 전파된, 세계에서 유일한 춤이자 연희였던 ‘신라박’의 발견은 매우 고무적이었으며 경주에서 선보일 수 있는 신라 대표 공연 콘텐츠로서 손색이 없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본고는 김 소장이 제공한 자료와 사진,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산예(狻猊)’... 신라오기에 등장하는 2인 1두가 추는 신라 사자춤 ‘삼국사기 제32권 제1잡지 악조’에 실린 ‘신라오기(新羅五伎)’는 신라말기 최치원 선생의 절구시 ‘향악잡영(鄕樂雜詠)’ 5수에서 읊어진 다섯가지 놀이다. 즉, 금환(金丸)·월전(月顚)·대면(大面)·속독(束毒)·산예(狻猊) 등으로 이 오기는 신라의 가무백희의 내용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라오기에 등장하는 2인 1두가 추는 사자무인 신라의 ‘산예(狻猊, 사자의 이칭)’라는 사자춤을 보고 최치원이 이런 시를 남겼다는 기록이 있다. 시 내용인즉, “遠涉流沙萬里來: 멀리 유사(流沙)를 건너 만리를 오느라, 毛衣破盡着塵埃: 털옷은 다 해어지고 먼지를 뒤집어썼네. 搖頭掉尾馴仁德: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휘두름에 어진 덕이 배었으며, 雄氣寧同百獸才: 굳센 그 기상 어찌 온갖 짐승 재주와 같을쏘냐”라고 노래했다. 산예는 사자탈을 쓴 가면극의 일종이었다.
한편, 김성혜 경주문화원 부원장은 “‘향악잡영오수’의 다섯 종류의 시 내용을 검토한 결과 5종의 성격은 가면춤 혹은 탈춤에 해당하는 것이 80%이며, 묘기 놀이가 20%다. 즉 최치원의 시 5종은 신라에서 연출해 행한 묘기와 가면놀이를 시로 묘사한 것이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면춤과 묘기’를 최치원은 ‘기악’ 혹은 ‘기악무’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고 ‘향악’이란 용어를 사용한 점이 흥미롭다. 따라서 최치원이 생존한 9세기 신라에서는 ‘향악잡영오수’처럼 가·무·악 이외 가면춤과 놀이를 모두 ‘악(樂)’의 범주에 넣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고대의 ‘기(伎)’ 혹은 ‘기악(伎樂)’은 가·무·악과 여러 가지 재주를 포괄한 넓은 의미를 지닌 용어였다”고 덧붙여 설명했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형태의 사자춤인 ‘신라박(新羅狛)’... 한 사람이 들어가 꾸몄으며 두 손과 발에 각각 사자 머리를 붙인 1인 5두 사자춤으로 신서고악도에 기록돼 1200년대 일본에 전하는 악서(樂書)인 신서고악도에서 묘사된 다양한 종류의 악기와 유희 중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신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유희가 조금씩 보인다는 것으로 ‘신라박(新羅狛)’과 ‘신라악(新羅樂)’ 등이 그것이다.
신서고악도에서는 ‘신라박’이라는 사자춤이 그림으로 기록돼있다. 이 사자춤은 1인 5두(한 사람이 추며 머리가 다섯인 사자춤) 사자무로, 당시 매우 유명해서 당나라에 전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신서고악도 속의 신라박은 한편, ‘중국잡기사’에서는 이렇게 기록되고 있다.
“신라예(新羅猊)는 조선 반도의 사자춤이다. 사자는 한 사람이 들어가 꾸몄으며 두 손과 발에 각각 사자 머리를 붙였다. ‘악부잡록’의 9사자도 이 계통으로...중략...현대 일본의 경사자(鏡獅子)가 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경사자는 가부끼에 나오는 1인 사자춤으로, 일본 1인 사자춤의 원조로서 신라박을 인정하고 있다. 신라박과 유사한 춤으로는 산예가 있었다.
-한국 사자춤의 기록상 역사는 1500년의 역사, 현재까지 여러 종류의 사자춤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승돼 최초의 기록(‘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으로는 지증왕 13년(512년)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 정벌시 위협의 목적으로 목우사자를 만든 것이 그 첫 등장이다. 가야에서는 우륵 12곡에서 ‘사자기(獅子伎)’라는 곡이 나오는데 이는 사자춤의 음악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우륵은 진흥왕 12년(551년) 신라에 투항하고 계고와 법지, 만덕에게 각각 가야금과 노래, 춤을 가르친다(552년). 이로써 가야에도 사자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에는 미마지가 612년 일본에 기악을 전파한다. 7세기 법륭사 일본기악사자 가면(일본 국보)은 미마지가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사자 가면을 가져가 귀족의 자제들에게 춤과 노래와 음악을 가르쳤다고 하는 것에서 연유한다. 이 탈들은 일본기악사자 가면으로 존속하고 있는데, 당대의 탈이거나 그 탈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여러 번 공연을 하려면 탈들이 있어야했고 나무로 만들었던 600~700년대의 탈들 230여 개가 현재 국보로 동대사와 정창원에 남아있다고 한다. 이는 백제의 미마지가 전한 탈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한편 조선에 와서 사자무의 기록은 단절된다. 1488년 명나라 사신 동월이 조선에 왔을때 자신을 위한 잔치에서 죽광대, 산악백희, 사자, 코끼리 등의 연희를 보았다고 기록으로 전한다. 조선시대 국가 중요 행사나 나례시, 벽사의 의미로 사자무가 추어진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에는 북청 사자놀이를 비롯해 봉산탈춤, 음율탈춤, 강령탈춤, 동래야류, 수영야류, 통영오광대, 하회별신굿탈놀이 등에서 여러 종류의 사자춤이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들놀음으로 주로 야외에서 추는 놀이 형태의 춤으로 남아있다면, 중국에서는 기예로써의 사자춤으로, 일본에서는 신사에서의 의식무로 각각 사자춤이 다른 방식으로 발달해 오고 있다고 김 소장이 덧붙여 설명했다.
-김용목 소장 인터뷰 “신라 사자춤 두 가지나 있었는데 정작 지금 경주에는 사자춤 남아있지 않아”
“신라 석상의 사자상이 바로 산예였고 신라박이었습니다” 괘릉 등에서 현존하는 많은 석상의 사자상과 견주어 보아도 신라박의 얼굴 모양이 거의 흡사해 김 소장이 실제로 신라박을 구현할 때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현재 김용목 소장은 지난해 회원들과 함께 실제 제작에 임해 신라박 사자탈을 재현해 놓은 상태다. 고령 축제에서 첫 선을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 경주에서 선을 보인 예는 없다고 한다. 춤 사위 연구와 음악, 구현할 인력 등 아직 갈 길이 멀다.
“삼국사기 ‘신라악’에서는 우리나라의 사자춤들은 그 기원을 신라 최치원의 향약잡영오수중 ‘산예’에 두고 있습니다. 또 ‘신라박’ 이라는 사자춤은 1인이 5두로 추는 세계에서 유일한 사자춤 입니다. 이는 신라시대 연희 중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 등이 전무했습니다. 고구려, 가야, 백제 신라에서 행해진 사자춤이었지만 신라 권역인 경주에서는 정작 사자춤을 볼 수 없습니다”고 안타까워했다.
“신라박이 비록 그림 한 장으로 남아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신라의 캐릭터로 내세워도 될만큼 대단히 중요한 기록입니다. 경주에는 ‘신라박’ 같은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당나라에까지 전파된, 세계에서 유일한 춤이자 연희였기 때문이지요. 이런 상징성을 가진 역사속 기록에 있는 이 캐릭터야말로 신라천년의 가치를 돋보이게 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경주의 상징이 돼야 하는 강력한 근거로써 신라 사자춤을 강조하는 그는 경주의 역사와 문화의 틀 위에서 활용의 콘텐츠를 부활시켜 ‘법고창신’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국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유사한 캐릭터 보다는 신라의 공연 콘텐츠인 사자춤을 재현해서 전국 어디에도 없는 사자춤을 무대에서 구현돼야 하는데 개인의 힘 만으로는 도무지 어렵습니다. 경주시의 작은 관심과 지원만으로도 가능한 일인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