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량부의 행차에서 철륜은 복사꽃보다 고운 여인을 보게 되었다. 도화녀라고 하는 그 여인은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할 만했으나 일개 서녀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궁으로 불려 들어온 도화녀는 죽기를 한하고 왕의 잠자리를 거부했다. 차자였던 철륜은 특별히 제왕수업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도화녀의 그 결곡한 태도 앞에 철륜도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제왕의 위신을 되찾았다. 철륜은 깨질세라 부서질세라 도화녀를 다시 돌려보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도 상처 입지 않았다. 일상은 다시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그즈음해서 철륜을 받쳐주던 상대등 거칠부가 죽었다. 그러자 기왕에 동륜에게 줄을 댔던 사람들이 백정의 어머니 만호부인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백정의 나이도 열셋, 장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강력한 배후를 잃고 철륜은 하루아침에 옥좌에서 끌어내려지고 옥대를 빼앗기고 유궁(幽宮)에 갇혔다. 그 모든 일이 물결 한 번 크게 일렁일 정도, 큰 바람이 한 번 지나가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사방 나무가 우거진 곳 낮은 처마. 마당은 풀이 허리를 접고 개구리와 뱀까지 출몰했다. 밤이면 멀지 않은 곳에서 짐승들이 울었다. 도무지 어디인지, 아마 이승과 저승의 중간 어디쯤일 거라고 철륜은 생각했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담 너머로 던져지는 먹을 것도 거부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목숨, 머리와 수염은 길게 자라 헝클어졌고 두 눈자위는 동굴처럼 깊어졌다. 비상과 추락이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히듯 하는 세상에는 미련도 없었다.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복사꽃처럼 아름다운 도화녀, 도저히 그녀를 두고 그냥 떠날 수는 없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도화녀를 볼 수만 있다면, 한 번 안아볼 수만 있다면……철륜은 그때까지 몸에 남아 있던 금붙이에 눈이 갔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빼주면서 도화녀의 소식을 사기로 했다. 유궁에 갇힌 채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는 어느 날, “지아비가 역질로 죽었다지, 아마?” 아침나절에 조밥 덩어리와 함께 담 너머에서 던져진 소식이었다.-남편이 없다면 어떠하냐?- -그때는 될 수 있습니다.- “아!아!아!,” 옛일이 떠오르자 철륜은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철륜은 마지막 남은 금가락지를 빼 넘겨주었다. “오늘밤, 이 담을 넘게 해 달라.” 그대로두면 딸이 자진이라도 할까보아 부모는 도화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폈다. 그러나 도화녀의 슬픔은 쉬 가시지 않았다. 열 하나에 첫 눈 맞춤, 그리고 십여 년을 함께해 온 세월, 남편의 목소리와 남편의 말투, 유달리 해사한 얼굴까지, 잡힐 듯이 선명했다. 도화녀는 두 개의 베개를 나란히 놓고 누웠다. 남편의 사랑을 기억하려고 애를 쓰며 간신히 눈꺼풀을 붙였다. 그때 마당에서 발소리가 났다. 발소리는 도화녀의 방 앞에서 멈추었다. 문을 열자 도화녀 앞으로 희끗한 물체가 다가섰다. 귀신이었다. 해골위에 산발한 머리가 얹힌 그 물체는 분명 귀신이었다. 귀신이 입을 열었다. “그간 잘 있었는가. 나는 철륜왕이다” 두런거리는 소리에 도화녀의 부모도 밖으로 나왔다. “꼭 한 번만이라도 그대를 보지 않고는 죽을 수도 없었다!” 진정 이것이 꿈인 것일까. 그러나 꿈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었다. 도화녀의 손을 잡는 왕의 손은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인간의 손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남편의 일은 참 안되었네” “......” “허나 그때 남편이 없으면 가(可)하다는 한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네!” 도화녀의 부모가 공손히 철륜을 방안으로 모셨다. 그렇게 꿈인가 하면 꿈같고 생시인가 하면 생시 같은 나날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철륜은 그렇게 이레를 머물고는 또 귀신인 듯 허깨비인 듯 떠나버렸다. 그즈음 왕실의 원찰, 흥륜사에서는 미륵선화의 간 곳을 몰라 애타하는 진자의 기도소리가 밤도 없고 낮도 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도화녀는 열 달을 지나 한 사내아이를 낳았고 비형이라 이름 지었다. 소문은 왕실에도 날아들었다. 진평왕은 사촌 동생이 되는 비형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수나라가 아직 정식으로 책봉을 내려준 것도 아니어서 왕위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 불안을 없애고자 위화부와 시위부를 신설했건만 그 자리에 앉힐 인물 또한 마땅한 자가 없었다. 고구려에 이어 백제 쪽의 변경도 들썩거렸고 허물어진 성을 고쳐 쌓아 전쟁대비도 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왕명출납과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성을 안심하고 맡길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태산처럼 믿었던 사위 용수가 죽었다. 비형으로 말하자면 용수의 이복동생이니 용수를 대신할 수 있으리라! 왕은 지체없이 비형을 불러들었다. “비형이라니, 코에 뿔이 났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용이 아니냐? 이제는 궁에도 들어왔으니 너를 용춘이라 부르리라” 용수가 맡았던 일을 이어받게 했다. 용수의 짝이었던 천명도 용춘에게 주었다. 비형, 아니 용춘은 대궁, 양궁, 사량궁 등 세 궁궐을 돌보는 중책에다 병부령, 지금으로 치면 국방장관까지 겸하게 했다. 용춘은 왕의 뜻을 잘 받들었지만 ‘밤마다 궁궐 담을 날아 넘어 황천에서 귀신들과 어울려 놀다가 새벽이 되어야 돌아왔다.’ 밤새 귀신을 데리고 놀았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마음으로 승복하고 따랐다니 한 번쯤 왕위를 넘실거릴 만도 했지만 비형, 아니 용춘은 다만 묵묵히 왕의 뜻을 따랐다. 진평왕에 이어 선덕여왕에게도 변치 않는 충성을 바쳤다. 탑을 지으라면 탑을 짓고 절을 지으라면 절을 짓고 전쟁터에 나가라면 전쟁터를 나가고 지방 순무를 명하면 순무를 돌았다. 선덕여왕 당시 영묘사를 지은 것은 두두리라고 하는데 두두리란 귀신, 혹은 도깨비라는 뜻의 신라말이다. 어쩌면 영묘사를 지은 이도 용춘일 것이다. 소장 이백 인을 거느리고 황룡사 목탑도 지었다. 황룡사 목탑을 지을 때 아비지가 꿈에 보았다는 노승과 장사는 자장과 용춘이 아니었을까. 꿈이 꿈 아니라 공사장을 오가는 용춘을 보고는, 귀신도 다스렸다는 그 위엄에 놀라 탑을 아니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실로 지혜로웠던 아버지 진지왕처럼 용춘도 사리판단이 명확하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 지혜가 무르익어 마침내 아버지의 이름을 빛나게 할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태종 무열왕 춘추이다. 한편 흥륜사의 중 진자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미륵선화, 서라벌에서 웅천주로, 웅천주에서 천산으로, 천산에서 다시 서라벌에 돌아와서야 찾아냈던 미륵선화는 진지왕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륵 하생의 태평성대는 이렇게 진지왕과 함께 왔다가 진지왕과 함께 신라를 떠나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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