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봉(和奉) 김용성 선생(1918~2003)은 일생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 즉 불우한 사람들을 위한 헌신으로 일관해 온 이다. 국내의 노인복지, 아동 복지, 장애인 복지, 나환자 복지 등 사회 복지 전반에 걸쳐 필요한 시설을 운영하면서 복지 사업에 이바지했다. 특히 해방을 전후한 이 나라 사회복지 사업의 초창기에 복지 사업의 불모지에서 민제양로원을 창설해 노인복지사업의 선구가 된다. 그 초지의 뜻을 일생동안 펼쳐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회복지시설을 창설하고 운영했다. 또한 사회복제제도의 마련과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연구해 새 시대에 맞는 사회복지사업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실로 크다. 국외의 복지에도 관심이 커 특히 동북아 지역의 복지, 교포들의 복지 뿐만 아니라 동양인의 복지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같은 헌신은 크게 결실을 거둬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등에 족적을 남기는데 그 공적을 기리며 수여한 상금을 모아서는 명화봉사상, 우봉봉사상 등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이들 봉사상은 후배 사회복지사업인들에게 수여해 후배를 양성하고 귀감이 된다. 특히, 김용성 이사장은 한국전쟁이후부터는 경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경주시를 중심으로 여러 사회복지사업을 전개했다. 오늘날 3개의 사회복지법인 산하에 13개의 복지 시설을 설립해 수많은 수혜 대상자들을 보살폈던 것이다. 경주사회복지 실현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나열하기도 힘들만큼 선생의 공과 업적은 실로 크다. 지난 20일 사회복지법인 나자레원 송미호 원장을 만나 일생을 복지사업에 전념한 선생의 족적을 따라 가보았다. 또, 사회복지법인 자선단 53주년, 나자레원 25주년을 맞아 그간의 자취를 정리한 기념 책자‘자선단 53주년, 나자레원 25주년 발자취(1997년 발행)’에서도 선생의 위대한 행적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오랜 세월, 오직 한마음으로 복지 사업에만 전념 김용성 선생은 생전에 “어렵게 자란 어린 시절에 가슴에 묻어 두었던 꿈을 펼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한 결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저는 숱한 고생을 겪으면서 자랐지만 그런 가운데도 나와 같은 어려운 불우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신념이 싹텄습니다. 우선 고아와 노인을 돌보야겠다는 생각에서 회령보육원과 민제양로원을 세웠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나라는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고 수많은 아동들과 노인들이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당시 나라 살림도 어려운 터라 이들을 위한 보조는 전무한 상태였지요. 저는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이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돌보고자 애썼고, 오늘에 이르러 작게나마 여러 분야의 사회 복지 시설을 갖추게 됐습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김용성 선생은 노인 복지증진을 비롯한 사회 복지의 바람직한 방향을 위해 힘 닿는데 까지 돕고자 했다. 오랜 세월, 오직 한마음으로 복지 사업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사회복지법인 나자레원 송미호 원장은 “사회복지사업이 이익보다는 봉사를 요하는 사업인지라 비록 재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 뜻과 정신 없이는 할 수 없는 사업입니다. 이사장님은 모든 개인적 이익을 마다하고 불우한 이들을 돕겠다는 일념 하나로 봉사에 일관했습니다. 사회복지사업을 향한 이사장님의 열정은 늘 활화산이었지요. 사회복지사업의 선각자요, 지금껏 이사장님의 행적과 궤도는 어두운 세상의 빛이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렇다. 선생은 소외된 이들을 위해 한평생을 살다 간 한국사회복지의 산증인이었다. -1952년부터 제2의 고향인 경주에서 사회 복지 전반에 걸쳐 필요한 시설 운영하면서 복지 사업에 이바지 김용성 선생은 독립운동가였던 김덕보 선생의 장남으로 1918년 함경북도 웅기에서 출생했다. 4세에 모친을 잃은 후 누나와 함께 소련, 함경도, 충남 등으로 의지할 곳 없는 생활을 하면서 근근히 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충남 공주영명중학교를 다니던 중에는 신문 배달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을 했다. 19세 되던 해 독립운동을 하던 부친이 체포되어 옥사하자 더욱 앞길이 막막해진 선생은 이후 만주 신경에서 만주대륙 화학원을 졸업한다. 고학으로 학업을 마쳤으니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불우한 환경 속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그는 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1944년, 회령의 한 고아원을 돕기 위해 자선단을 조직하면서 사회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또,만주 간도성에서 조선인 농촌 구제사업으로 자선 사업을 한다. 이때부터 그는 고아와 노인들을 돌보기로 한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할 일생을 다짐하였고 1947년 함경북도 회령읍 오산리에 민제양로원 설립을 시작했으나 북한정부는 이런 선생의 일들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비과학적인 교육을 시킨다는 구실로 재산을 몰수한다. 이후 전란으로 오갈데없는 이들을 돕기위해 동분서주하다가 1950년 12월 국군 후퇴를 계기로 가족과 더불어 고기잡이하는 목선에 몸을 싣고 구사일생으로 남하한다. 1951년 영덕 강구에서 피난민 5000여 명의 피난민 회장으로 선발되어 난민 구호에도 앞장섰다. 1952년 2월, 당시 경주읍에서 경주 월성군 산하 피난민 8000명의 회장으로서 피난민 구호 사업에 앞장서는 한편, 자신이 거처하던 단칸방을 내어 유랑걸식하다 지친 노인들을 한 두 사람 돌보던 것이 계기가 돼 그해 3월, 민제양로원을 재창설해 무의무탁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는 일을 하면서 오늘날 민제의 집에 이른다. 또 전란으로 마땅한 학교가 없는 경주에 걸식으로 연명하는 많은 어린이들을 위해 자유학숙을 설치한다. 그리고 52년 경주시 서부동에 산아원을 설치해 57년까지 미혼모와 영아들을 수용했다. 53년 7월에는 경주시 북부동 하천부지에 천막을 치고 걸식하는 나환자들을 위해 성락원을 창설하고 58년까지 수용보호했다. 현재는 나환자촌 집단시설인 희망촌을 세워 자급자족하게 하고 있다. 56년엔 경주시 서부동에 경주 모자원을 창설해 경주 애가원이라는 모자보호시설을 운영해 96년까지 모자들을 수용, 구호했다. 58년에는 경주시 북부동에 자성원(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수용 구호했으며 1960년에는 경주시 황남동에 재단법인 명화회 성애원을 창설해 고아들을 수용보호했다. 1962년 경북도내 무의걸식, 부랑아, 연장고아 등 550명을 위탁받아 경주시 암곡동에 사재 임야 55만평을 개간하고 가옥 130동을 지어 자활정착사업장을 운영했으나 재정난을 겪으면서도 10년간 830명을 수용보호하고 138쌍을 결혼시켜 완전 자립하게 했다. 이 사업장을 운영하는 동안 수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60여 년간 사회복지에 기여한 헌신적 삶 들여다보니..., 선생은 생전 수많은 사회사업 중 61년부터 심혈을 기울인 사업으로 경주 부랑아 자활 사업을 꼽았다고 한다. 선생은 전 재산을 털고 당시 230만원의 빚을 내 북부동에 120만평의 황무지에서 부랑아들과 천막생활을 시작했다. 땅을 개간하고 벌목과 집을 짓는 4년간의 중노동 끝에 황무지는 옥토로 변했고 140채의 번듯한 집이 들어섰다. 그들과의 철야 면담을 하는 등 의 노력으로 범죄자들을 사회의 일꾼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궈내기도 했다. 국가로부터 한 푼도 보조를 받지 않았던 이 사업은 자활이라는 새로운 사회사업 방식을 제시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선생은 또 노인 복지 사업에 ‘거택보호’라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일반화 시키기도 했다. 송미호 원장은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일본에 의해 어려운 시절을 보낸 선생이 한국인과 결혼해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부인들(배우자 사별, 생이별한 부인들) 중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1972년 나자레원이라는 시설로 보호를 한 것입니다. 한일 양국의 굴곡진 역사의 뒤안길에서 수없이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했던 한국에 사는 일본 국적의 할머니들을 다정한 눈길과 따스한 손길로 감싸주었던 것이죠”라고 했다. 이는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일본 여류 작가가 소설 ‘경주나자레 愛’를 펴내기도 한다. 이 사업에 감동을 받은 일본인 천 여 명은 김용성 후원회를 조직해 후원하기도 했다. 그들 중 현재까지 147명을 영주 귀국하도록 했다.-1944년부터 2003년 타계하기까지 몸소 실행한 사랑의 정신 선생은 이런 일들 외에도 사회복지 발전을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실행한다. 전국양로협회, 한국노인복지시설협회, 전국노인복지협의회 조직 및 회장을 역임했으며 사회복지연구원 창설을 통한 학계의 발전에도 공헌한다. 특히 한일국교정상화가 1965년 이뤄지는데 이를 위해 대표로 선생이 선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사절단 대표 자격으로 단장이 된 것이다. 72년에는 경주 구정동에 있는 극빈 농촌학생을 위한 불국사실업중학교가 재정난에 문을 닫게 되자 이 학교를 다시 일으켜 1974년 3월까지 300여 명이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게 했다. 77년 한일사회복지교류 연락협의회 회장역임, 84년 평화통일자문위원으로 10여 년간 경주지역사회 역군으로 활약하기도 한다. 88년 경주시 구정동에 명화요양원을 신축하고 나자레 요양원, 성애원이 증개축 됐다. 91년 국제봉사상금 2000만원으로 명화봉사상을 제정하고 93년 삼성재단 호암상 수상금 5000만원으로는 우봉봉사상을 제정해 격년마다 전국의 모범 사회사업가에게 금메달과 상장을 수여하고 있다. 또한 95년에는 구정동에 생활하고 있는 아동과 노인들을 위해 교회를 건립했다. 이밖에도 1990년에는 중국 연변에 노인회관을 지어 취미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시설보호 외에도 아시아 한국대표 각국의 회의와 국교 정상화 계몽운동, 한일 사회복지교류 연락협의회 등의 민간 외교 활동에도 앞장서서 활동했다. 선생은 일본에 대해서는 최대의 희생자임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초월한 사랑의 정신으로 그들을 포용했다. 한국, 중국, 일본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실천자이자 지도자로 일본 및 중국에서 지금껏 추앙 받고 있다. 1944년부터 2003년 3월 타계하기까지 그가 몸소 실행한 사랑의 정신과 철학은 자선단 산하시설(사회복지법인 자선단, 나자레원, 우봉복지재단 등의 산하기관) 내 녹아 유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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