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높이 333㎝, 지름 227㎝로,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며, 성덕왕 24년(725)에 제작된 상원사 동종(銅鐘)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범종을 대표한다.
신종은 압도적인 무게와 크기만큼이나 설치장소가 여러 번 바뀌는 시련을 겪었다. 원래 신라 35대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혜공왕 7년(771)에 완성해 봉덕사(奉德寺)에 설치되었으나, 북천가의 봉덕사가 수해로 폐사돼 1460년 영묘사로 옮겨졌다. 당시 서거정(1420~1488)은 「경주십이영(慶州十二詠)」 가운데 「영묘구찰(靈妙舊刹)」에서 영묘사에 걸린 신종을 언급하였다. 또 1506년 영묘사 화재로 경주부윤 예충년(재임기간1506.11~1507.12)이 경주읍성의 남문 밖으로 옮겨 군대의 징집과 성문의 개폐에 종을 타종하였으며, 이후 다시 세월의 풍파를 겪어 봉황대에 종각을 짓고 보호되다가, 이후 1915년 8월 일제강점기 때 경주고적보존회에 의해 종각과 함께 경주시가지 동부동의 구)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종각에 설치된다. 근대에 와서는 1975년 5월 국립경주박물관이 신축 이전됨에 따라 종각은 그대로 둔채 신종은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경주시 인왕동 76번지) 앞마당으로 옮겨지면서 새로운 보금자리에 안치됐다. 이렇듯 많은 이건의 이력을 가진 신종은 현재 균열이 발생해 쓸쓸히 천년의 소리를 머금고 가만히 지난 세월을 되뇌고 있다.
『삼국유사』제4,「탑상(塔像)」,《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皇龍寺鐘 芬皇寺藥師 奉德寺鐘)》에 신종의 내력이 적혀있다. “신라 35대 경덕대왕이 천보 13년 갑오(754)에 황룡사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는 1장3촌,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7,581근이었다. … 또 경덕왕은 황동 12만근을 내놓아 그 아버지 성덕왕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그 아들 혜공대왕 건운이 대력 경술(770) 12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공장이들을 모아 완성시켜 봉덕사에 안치했다.
봉덕사는 효성왕이 개원 26년 무인(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의 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것이기 때문에, 그 종명에 ‘성덕대왕신종지명’이라 했다.(성덕대왕은 경덕대왕의 아버지 전광대왕을 말한다. 종은 본래 경덕대왕이 그 아버지를 위해서 시주한 금이었으므로 성덕왕의 종이라고 한 것이다) 조산대부 전태자사의랑 한림랑 김필월(해)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종명(鐘銘)을 지었으니 글이 너무 길어서 여기에 실지 않는다.” 그런데 수산(修山) 이종휘(李種徽,1731~1797)는 「동사열전․ 설총최치원열전」에서 “봉덕사종 11만근(奉德寺鍾十有一萬斤)”으로 무게가 차이나고, 당주(鐺洲) 박종(朴琮,1735~1793)은 「동경유록」에서 “종명에 종은 당나라 대력 신해년(771])에 완성되었다.(按鍾銘 鍾之成在唐大曆辛亥)”전한다. 종명은 630자로 된 서문과 200자로 된 명으로 짜여 있고, 성덕왕의 공덕을 종에 담아서 대왕의 공덕을 기리고, 종소리를 통해서 그 공덕이 널리 그리고 영원히 나라의 민중들에게 흘러 퍼지게 해서 국태민안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겨 있으며, 신종의 예술적 가치와 뛰어난 종의 명문은 양각된 비천상과 더불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조선의 여러 문인들 역시 경주를 찾아 옥적과 신종 그리고 여러 문물에 대해 읊조렸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1776~1852)과 암서(巖棲) 조긍섭(曺兢燮,1873~1933) 등의 한시가 신종의 일을 대변한다.-聽鍾(청종) 종소리를 듣다 - 홍직필鍾動九街響滿城(종동구가향만성) 종소리가 도성에 진동하니 성안에 가득하고/爲分昏曉趁時鳴(위분혼효진시명) 저녁과 새벽을 구분하려고 때마다 울리네/可憐不被金莖徙(가련불피금경사) 가련하도다. 금경은 옮겨지지 않았건만/猶□千年故國聲(유□천년고국성) 아직까지 울림은 옛 천년의 소리라네『매산집』권1에 실린 한시로, 홍직필은 조선시대 신종이 도성에 걸려 시간을 알리는 사사로운 일에 사용된 것을 가련하다고 표현하였다. 금경(金莖)은 한무제가 감로라는 이슬을 받기 위해 동으로 만든 승로반(承露盤)을 바치는 구리 기둥으로, 경주에 남아있는 철제 당간(幢竿)을 말하며, 당간은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켰건만 여러 번 자리를 바꾼 신종의 운명은 대조적이다. 천년의 소리를 간직한 신종과 금경을 비유한 홍직필의 문장력이 돋보인다.-東都懷古〕 동도에서 옛일을 회고하다 - 조긍섭百代新羅國(백대신라국) 오랜 세대의 신라국/秋風爲一經(추풍위일경) 가을바람 한 시련을 겪었네/城形猶似月(성형유사월) 월성의 모습 마치 반달 같고/臺影舊瞻星(대영구첨성) 오래된 첨성대 그림자가 짙네/澹日鷄林樹(담일계림수) 계림 숲엔 산뜻한 해 비치고/寒烟鮑石亭(한연포석정) 포석정엔 안개가 자욱하다네/金鍾豈哀怨(금종기애원) 금종은 어찌 그리 애절하던지/只自世人聽(지자세인청) 오로지 세인들은 듣기만 할 뿐 조긍섭은 동도를 찾아 구석구석을 유람하며, 월성과 첨성대의 변함없는 모습과 김알지의 탄생설화 계림에 비치는 햇살과 신라망국의 장소 포석정에 드리운 안개 등을 표현하며 신라의 흥망성쇠에 대한 애상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여전히 금종(신종)만이 슬프게 원망하듯 울릴 뿐, 천년의 기억을 담은 신종의 애상함과 망국의 한을 깨닫지 못한다. 신종은 여러 번 자리를 옮겼으나, 월성주변을 벗어나지는 못하였고, 조선에 와서는 도성에 걸려 사소한 일에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으니, 신종의 소소한 역할에 애잔함이 느껴진다.
지금이라도 신종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세우고, 신라의 신종으로 존숭하는 마음을 담아 그 종소리를 다시 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