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탑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이라고 되어 있으나 석탑의 뒤에 있는 또 다른 표지석에는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이라고 적혀 있다.
아마 이 석탑이 있는 곳의 행정 구역이 구황리이기 때문에 ‘구황리 삼층석탑’이라고 하다가 부근에서 수습된 기와조각과 석탑 안에서 나온 사리함 뚜껑에 새겨진 명문의 판독 결과에 따라 ‘황복사지 삼층석탑’으로 그 명칭도 바뀐 것으로 보인다.
탑은 드물게 석가탑이나 다보탑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보통 절 이름(절터만 남아 있는 경우는 그 절터 명, 절 이름도 알 수 없는 경우는 마을 이름)과 층수 및 재료 순으로 명명하고, 층수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층수를 생략하고 탑의 명칭을 정하게 된다. 이 탑은 높이 7.3m인데 노반만 남고 상륜부는 없다. 이 탑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부분의 탑은 상륜부를 잃어 버렸다.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거나, 혹은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어쨌든 그 오랜 세월을 지켜오기가 힘에 벅찼는가 보다.
하층기단은 면석과 갑석이 각각 8매인데, 각 면에는 우주(隅柱, 양쪽 모서리기둥)와 2주의 탱주(撑柱, 버팀기둥)가 새겨져 있으며, 갑석 상면에는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굄이 있고, 그 위의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의 면석도 8매인데, 각 면에는 하층기단과 마찬가지로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4매의 판석 위를 덮은 갑석 아래에는 부연(副椽, 처마 밑에 덧얹어 건 짤막한 서까래)이 있으며, 갑석 위로는 2단의 각형 굄대가 있어, 그 위의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기 하나의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옥신에는 네 면에 각각 우주가 있다. 옥개석의 받침은 5단이고 옥개석 위로는 2단의 각형의 굄이 있어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치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신라석탑의 독특한 점이다. 옥개석 위 낙수면은 평평하고 4면의 합각이 예리하며, 귀퉁이가 약간 올라가 전체적으로 경쾌한 모습이다.
탑의 전각 양면에는 풍탁(風鐸, 작은 종)을 매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 경쾌하게 울리던 풍탁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석탑은 감은사지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보다 그 규모가 작다. 1942년 수리를 하면서 장문의 명문이 새겨진 금동사리함과 함께 금제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함의 명문에 의하면 이 탑은 692년(효소왕 1)부터 706년(성덕왕 5) 사이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복사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1928년에 부분적인 조사를 실시하고 또 1968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삼산오악학술조사단에서 절터의 일부를 발굴하였으나 아직 가람배치 등 전체 모습이 밝혀지지 않았다.
석탑의 동남쪽에 귀부 2좌가 파손된 채 논둑에 묻혀 있는데 그 중 남쪽 귀부의 귀갑에 글자 ‘王’이 새겨져 있어 왕의 비좌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사적비(寺跡碑)가 아니었을까?
『삼국사기』에는 692년 신문왕을 낭산 동쪽에 장사지내고, 924년 경명왕을 황복사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王’자가 새겨진 비좌는 두 왕 가운데 한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와 관련된 글을 쓰자면 반드시 현장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귀부는 몇 차례 답사를 하면서 익히 알고 있었으나 당간지주는 최근 두 차례 답사하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행방을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아예 관심이 없다. 이리저리 헤매는데 마침 마을 노인들이 어느 집 마당에 둘러 앉아 있다. 당간지주라고 하면 잘 모를 것 같아 큰 돌 막대가 있는 곳을 아는지 물었다. 마침 7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뛰어나와 상세하게 가르쳐 주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노인은 그 마을의 도서관이자 박물관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간지주의 일부로 추정되는 석재는 삼층석탑에서 남쪽으로 180여m 떨어진 논둑에 있었다. 또 민가 몇 곳에서는 건물의 초석이 눈에 띈다. 당간지주로 추정되는 석재가 옮겨진 것이 아니라면 당시 황복사 입구는 사찰의 동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