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17년도 『동방한문학』71집에 발표된 「조선시대 경주지역 유람과 유기(遊記)의 특징 고찰」 연구논문을 참고한 것이다. 관북유학자 당주(鐺洲) 박종(朴琮,1735~1793)은 선대(先代)의 박소(朴素)가 함경북도 부녕(富寧)으로 수년간 유배를 와 있었으며, 이후 박몽필(朴夢弼)이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옮겨와 살면서 함경도에 세거하였다. 그는 화곡(華谷) 박흥종(朴興宗,1600~1687)과 관북부자 송암(松巖) 이재형(李載亨,1665~1741)을 사숙(私淑)하였고, 노론계 담와(澹窩) 홍계희(洪啓禧,1703~1771)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1702~1772)에게 사사받았으며, 훗날 관북사현(關北四賢) 구암(龜巖) 이원배(李元培,1745~1802)등에게 학문을 계승하며 관북유학의 부흥에 힘썼다. 평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 전형적인 처사로써 주자학을 배우고 예학을 실천하며 대명의리(大明義理)를 좇은 관북의 선비였다. 1777년에 담와의 손자 홍상범(洪相範)이 정조시해미수사건을 일으킨 일로 인해 연루된 자들 모두가 죽임을 당할 때 박종은 절의를 지키다 영해(寧海)로 16년간의 기나긴 정배(定配)에 처했고, 인생 후반에는 영남학을 접하고 영남의 많은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게다가 백두산·청량산·칠보산 등 산천을 유람하며 조선후기 유기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저서인 ‘당주집’ 권14·15에는 「동경유록(東京遊錄)」을 포함한 다수의 ‘유록(遊錄)’이 수록되어 있다. 평소 산수벽(山水癖)이 깊었던 박종은 1767년 늦가을 함경도를 떠나 관동팔경-경주-옥산-칠곡-문경-충청도 안보-충주-경기도 양주로 돌아가는 장거리 여정을 「동경유록」으로 남겼다. 총 91일 여정 가운데 39일간(11월2일~12월7일) 경주에 머물면서 경주일대의 유적과 인산서원·옥산 등을 참배하고, 특히 신라십무(新羅十舞)라는 전통춤을 관람하는 등 일정별과 항목별 서술에 사실적 묘사를 더한 빼어난 글쓰기 방식으로 유기를 서술하였다. “정해년(1767) 9월 25일 경주 여행을 떠나다. 초가을 낙구(洛口:강천정)로부터 떠나 올 때에 담와선생께서는 장차 경주의 여행이 있으셨는데 부군이 월성에서 서로 만나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나는 현성택·이눌[자 민숙]과 함께하였다. 앞서 부군께서 이눌의 총민함과 영특함을 좋아하셨고, 이들은 사우(師友)간에 칭양(稱揚)하였기 때문에 함께 가기에 이르렀다. ‘鐺洲集’卷20,「附錄·年譜」,丁亥. 九月二十五日. 發東京之行. 蓋秋初自洛發時, 澹窩將有羅道之行, 要府君相會於月城, 故也. 玄友聖澤李生訥(字敏叔)與俱焉.(先時府君特愛李生聰敏英悟, 爲之稱揚於師友間, 至是與之偕行.)” 박종의 스승 담와께서 경주의 여행이 계획(당시 담와의 둘째아들 홍술해가 경주부윤으로 있었다)되었고, 박종과 월성[경주]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기에, 박종은 9월 25일이란 때를 맞춰 난촌(蘭村)을 떠나, 11월에 경주에서 스승을 만나 함께 유람하고, 12월 24일에 낙구로 돌아온다. 앞서 박종은 1767년 5월 2일 서울로 가서, 7월 25일에 고향으로 되돌아와 난촌에서 묵고, 2개월 후 9월 25일에 경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따라서 박종은 현성택·이눌과 함께 경주로 여행을 떠나게 되고, 함경도 안변과 관동팔경을 지나 오죽헌을 둘러보고, 11월 어느 날 경주에서 스승 담와를 만나 유람을 이어나간다. 그는 평소 경주에 대한 마음이 늘 있었고, 또 산수벽이 있어 유람이 주목적이면서도, 박혁거세의 시조묘를 참배하는 일과 옥산 등을 찾아 자신의 뿌리를 찾았으며, 우암 송시열을 모신 노론계 서원인 인산서원을 찾아 함경도의 학문적 연원과 스승의 발자취를 탐색하였다. 그 가운데 경주 유람의 마지막 여정으로 옥산서원을 찾은 박종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의 후손을 만났고, 그곳에서 회재와 퇴계선생의 유묵을 감상하고 유숙하면서 거유(巨儒)의 흔적을 찾았다. 사실 박종은 회재집안과는 먼 외손이 되는데, 13대조이신 박숭부(朴崇阜:부친 박충무의 8남 가운데 6째 아들)의 따님이 회재 이언적과 혼인한 이력이 있다. 함양박씨는 예전부터 여강이씨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은 사실이 있으며, 당시 박씨들은 경북 의성 금성면에 집성촌을 이뤘고, 양동마을과 의성은 영천을 가로질러 산을 넘으면 닿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즉 박종에게 있어 회재선생 집안은 외가에 해당되며, 회재선생 사후 200여 년이 지나서, 먼 외손의 신분으로 회재의 후손을 만나 역사적인 재회를 한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회재의 아들 잠와(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의 후손들을 만나 융성한 대접을 받았고, 나아가 도통의 연원까지 확인하였다. 이것이 천리길을 걸어 경주를 찾은 함경도 문인 박종의 유람배경이 된다. 당주 박종에 대한 필자의 연구논저로는 [「關北儒學者 당주 朴琮의 生涯와 道學淵源 考察」, ‘우리어문연구’54, 2016./「鐺洲 朴琮의 東京遊錄 硏究」, 「동양한문학회」43, 2016./「鐺洲 朴琮의 淸凉山遊錄 硏究」 『동방한문학회』 67, 2016.]이 있으며, 「동경유록」은 박종을 통해 당시 경주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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