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을 영어로 April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아프릴리스(Aprillis)’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로 미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Aphrodite)가 ‘4월의 여신’이다. 그녀는 사랑과 미와 풍요의 상징으로 로마신화에서는 ‘비너스(Venus)’이다. 화사한 꽃이 온 누리에 가득하다. 사랑이 넘치는 계절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황복사지를 찾았다. 그러나 아직 황복사지 주위는 황량하다. 단지 삼층석탑만이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빈터에 생끗 웃고 있는 노란 민들레가 필자를 반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민들레는 거의가 외래종이다. 꽃받침을 보고 외래종과 토종을 구별할 수 있다. 외래종은 꽃받침이 아래로 뒤집혀 있는데 토종은 꽃을 감싸고 있어 토종이 꽃받침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젊어서 한때 읽은 적이 있는 무협지에 경신술(輕身術)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 술법은 글자 그대로 몸을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눈을 밟아도 흔적이 남지 않은 답설무흔(踏雪無痕), 풀을 밟아도 풀이 눌리지 않는 것은 물론 풀이 휘는 약간의 반동을 이용해 날아가는 초상비(草上飛), 수면을 밟고 달리는 등평도수(登萍渡水), 마치 허공에 계단이 있는 것처럼 날 수 있는 능공허도(凌空虛渡) 등이 있었다. 능공허도의 경지에 이르면 하늘을 나는 신선이나 다름없다. 『삼국유사』 「의해」편 ‘의상전교’조에 능공허도의 비법을 구사한 의상스님의 이야기가 있다. 스님이 황복사에 있을 때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그때마다 계단을 밟지 않고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이 탑에는 사다리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그 무리들도 층계에서 3자[三尺]나 떨어져서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무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니 세상에 알릴 일이 아니다” 의상스님은 이곳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해동화엄(海東華嚴)의 초조(初祖)’라는 별칭처럼 화엄사상의 발전과 보급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 기록에 의하면 신비한 능력까지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으니, 의상스님이 계단을 밟지 않고 허공은 돌았다는 언급으로 보아 당시 석탑이 아닌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절터에서는 목탑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국보 제37호로 지정된 삼층석탑만 남아 있다. 의상대사가 당(唐)에 들어가 공부하고 귀국한 것은 나이 46세가 되던 해, 즉 문무왕 10년(670년)이라고 하니 당시 신라의 왕경에는 거의 목탑이 세워지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의상대사가 올랐다는 탑도 목탑이었을 것이다. 황복사가 창건될 때는 목탑으로 창건되었다가 석탑으로 바뀌어진 것은 아닐까? 현재 목탑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니 목탑 자리에 석탑을 세웠거나 아니면 확인이 되지 않은 어딘가에 목탑이 있었고 석탑이 추가로 건립된 것일까?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유물 중에, 1937년경 낭산 동쪽 기슭에서 수집한 명문(銘文)이 있는 기와조각이 있다. 이것은 당시 부산에 거주하였던 일본사람이 소장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와 뒷면에 ‘皇福寺’라 음각되어 있다. 이 기와조각은 비록 발견지점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낭산 동쪽 기슭에 황복사가 있었다는 전설의 근거를 제공하는 유물이다. 또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에도 낭산 어디쯤인지 발견지점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王福’이라 음각되어진 기와조각이 있는데 왕분사(王芬寺)가 분황사(芬皇寺)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보아 왕(王)과 황(皇)이 같은 뜻을 가졌다고 보면 이 기와조각은 황복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근거가 될 수 있겠다. 『동경통지』에는 황복사지를 낭산의 동쪽에 있는데 삼중석탑(三重石塔)에 팔부중상이 조각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곳 석탑에는 팔부중상의 조각이 없고 위치도 낭산의 동쪽이 아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명문이 있는 기와조각의 발견지점도 낭산의 동쪽이라고 하는데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정확한 위치는 낭산의 북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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