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생기가 ‘드글드글’ 끓어대던 제재소의 현장은 굵은 목재를 재단하는 굉음처럼 강렬하고 힘찼던가요? 통나무들이 화려한 변신을 하는 곳. 바로 베어 낸 나무를 판재나 각재로 켜서 재목을 만드는 ‘제재소’입니다.
황오동 경주고 지하도를 지나자마자 위치한 ‘정화제재사’의 약 1000평 정도 제재소에 쌓아놓은 통나무들은 시베리아 어느 벌목장을 떠오르게도 하고, 제재를 기다리는 거대한 원목들과 톱밥에서 진동하는 신선하면서 구수한 향기는 울컥 고향을 유추하게도 합니다.
정화제재사의 허름한 간판은 얼핏 이 제재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소박해 보입니다. 아직 옛 풍경들을 더러 간직하고 있는 황오동에 있는 제재사이긴 하지만 도심속에서 낯선 섬처럼 생경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제재소는 원래 대릉원 서쪽 담 모퉁이에 있었는데 1968년 5월 이곳으로 이전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기계와 공장건물도 그대로 해체해서 다시 이곳에서 복원시켰고요.
그래서 70~80년전 일제강점기 목재소의 모양 거의 그대로이며 뒷동의 건물은 55여 년 됐다고 합니다. 주목할 점은 한 작가가 이 제재소 건물을 모델로 해서 똑같이 지어 서울의 근로자복지회관에 배치해 두었다고 합니다. 제재사의 풍경은 어느 영화의 한 장면속 근대의 그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감상적 시각을 이제는 거둬야 할 것 같군요.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부터 전후 재건사업과 수출주도정책으로 합판을 비롯한 각종 제재목들의 수요가 급증해 제재소들이 성업을 이루었으나 점차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지요.
2012년 기자가 취재할 당시 이곳의 직원은 대표를 포함해 9명이었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제재 일의 수요가 차츰 줄어들어 지금은 직원이 5명이라고 합니다. 특별한 용역 주문이 들어오면 인력을 충당하는 식으로 운영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용강동 모 제재소가 사정이 어려워져 문을 닫았으니 이를 방증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제 큰 규모의 제재사로는 천북면 화산리 한 곳과 이곳 정화제재사만 남았습니다.
최근에는 인천 등에서 아예 제재가 돼서 조립만 하면 되도록 내려오는 형태로 바뀌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이로써, 인건비를 줄이는 셈이지만 집의 형태는 다양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인 목재를 사용하는 집 형태가 많아지는 건 어쩔수 없습니다. 절이나 일반 한옥을 정화 제재사에서 다양하게 제재된 목재로 짓는다면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집을 지을 수 있겠지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경주 외곽 내남 등지에서 노후를 여유롭게 보내려고 한옥을 짓는 수요가 많았는데, 지진 이후로는 그런 수요조차 확연히 줄어버렸다고 합니다. 이 제재사를 그저 밖에서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만은 없는 것이 제재사의 ‘현재’인 것이죠.
삶은 이렇게도 고단한가요? 우리는 그저, 언제까지나 이 제재사가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랄뿐입니다.그림=김호연 화백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