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이야기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녀석 손에 들린 받아쓰기 시험지가 춤을 추고 있었다. 85라고 쓰인 빨간 색연필 숫자도 덩달아 흔들렸다.
“오, 우리 아들 해냈구나!”
아빠도 기분 좋게 아들을 맞이한다. ‘신발 좀 가지런하게 벗으라’고 늘 노래하던 잔소리도 까먹을 정도로 말이다. 유유히 휘파람을 부르는 녀석 뒤통수를 말없이 쏘아보는 애 엄마의 레이저 눈(!)에 아빠는 이내 과장된 웃음을 거둔다.
2학년 첫 받아쓰기 시험에서 20점을 맞아왔던 녀석이 80점을 맞다가 급기야 85점을 맞아온 것이다. 이 정도면 잘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 엄마는 아닌가 보다. 하기야 며칠 동안 저녁 먹기가 무섭게 받아쓰기 연습을 해왔던 둘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럴 만도 하다.
성격이 밝은 건지 기억력이 나쁜 건지 녀석은 애 엄마 앞에서 저렇게 히히 대고 있다. 딱 잠자는 호랑이 꼬리로 장난치는 하룻강아지 같다. 왠지 오늘도 녀석은 울면서 잠이 드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애 아빠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녀석이 아직 눈도 못 뜨고 고개도 못 가눌 때였으니까 태어난 지 겨우 두어 달 지났겠다.
황달이 너무 심해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있었다. 너무 가는 아기 팔에서 혈관을 못 찾겠다는 이유로 무미건조한 얼굴의 간호사는 녀석의 연약한 목에 무지막지한 두께(!)의 바늘을 찌르고 있었다. 차마 그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애 엄마는 녀석만큼 떨고 있었다. 그 눈에는 눈물과 후회, 애잔함과 제발 살려만 달라는 간절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저 돼지같이 건강하게만 자라다오!’하고 그렇게 기도하던 애 엄마였었는데 지금은 변해도 너무 무섭게 변해 있었다. 아, 이래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고 했던가….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고 “여보, 시험도 끝났으니 오늘 우리 치킨파티라도 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애 엄마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혼자 있고 싶었나 보다. 그 휑한 느낌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남자 둘은 어색한 눈웃음을 교환할 뿐이다.
“아들, 우리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갈까?”
우리는 이유 없이 목이 말랐다. 아니 말라야 했다. 그렇게 아파트 문을 빠져나왔다. 애 엄마 것도 하나 챙겨들고는 녀석과 아이스크림을 우물댄다. 입에 하얀 게 잔뜩 묻어있는 녀석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나 보다. 아이스크림 작대기를 빨다 말고 “아들, 누가 뭐래도 아빠는 니가 자랑스러워, 아빤 행복해”라고 했다.
아들은 난데없는 행복 타령이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지금 엄마 기분이 어떨지 알 리가 없는 녀석의 천진함은 아무 잘못이 없다.
“아들아, 저거 클로버 아냐?”
얼른 화제를 돌린다. 며칠 동안 비가 오더니만 인도 블록 틈새로 클로버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토끼풀이라는 예쁜 이름의 클로버는 우리 아련한 추억에 늘 피어 있었다.
어릴 적 눈을 감고 있으면 내 엄마는 내 손가락에는 토끼풀 반지를, 누나 목에는 토끼풀 목걸이를 만들어주곤 하셨다. 요즘이야 초등학교 여학생들조차 입술을 빨갛게 화장하고 교문 밖을 나서는 세상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드름 난 남자애들한테 건네받은 가장 예쁜 마음이 클로버 반지였었지 아마. 짧고 통통한 아들 손가락에 반지라도 하나 끼워줄 심산으로 허리를 숙이니 아이스크림 봉지를 흔들며 아들이 퉁명스레 내뱉는다.
“아빠, 네 잎 클로버 없어, 그냥 가자”
꽃마다 꽃말이란 게 있다. 빨간 장미는 ‘사랑’이고 흰 백합은 ‘순결’이다. 혹 우리에게도 어울리는 꽃말이 있을까 해서 사전을 찾아봤다. 중생(衆生)이란 단어가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행운(네 잎 클로버의 꽃말)을 잡기 위해 기꺼이 손에 쥔 행복(세 잎 클로버의 꽃말)을 버리는 존재’라고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