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단무지
-이윤학
옹벽 위에서 쏟아져 내린 개나리 줄기들옹벽에 페인트칠을 한다.보도블록 바닥으로페인트 자국 흘러내린다.옹벽 밑에는일렬횡대로종이박스가 깔렸다.할머니들은머릿수건을 쓰고 앉아나물과 밑반찬을 판다.개나리 줄기들이 내려와허옇게 센 머리카락 쓰다듬는다.염색 물을 들이기 위해길고 가는 붓질을 한다.노랗게 물든 단무지들플라스틱 대야에 담겼다.쳐다보는 사람 머릿속에아득히 색소 물을 들인다옹벽에 기대 잠든 할머니둥글게 입을 오므렸다단무지 한 조각 집어 삼켰다쩝쩝 입맛을 다신다
-노랑에 취한 봄날 풍경 이즈음 햇살 좋은 개나리 밭 부근에 가 보면 우리는 온통 노랑에 취한다. 이 시가 그렇다. 축대 위, 잎겨드랑이에서 생겨난 개나리 기다란 꽃줄기들이 아래로 늘어지며 노란 페인트 자국을 보도블록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개나리 꽃들은 벽에 칠을 할 때 툭툭, 떨어지는 방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윤학은 확실히 묘사의 시인이다.
그뿐인가. 줄기들은 축대 아래 나물과 밑반찬을 파는 할머니, 허옇게 센 머리카락이 안쓰러웠던가? 염색 물을 들이기 위해 정성을 들여 “길고 가는 붓질을 한다.” 자연과 인간의 내밀한 친화! 이런 친화는 플라스틱 대야에 담긴 “노랗게 물든 단무지들”이 “쳐다보는 사람 머릿속에 색소 물을 들”이는 데서도 드러난다.
노곤한 봄볕에 취해 할머니는 축대에 기대 둥글게 입을 오므리고 잠이 든다. 그녀는 한번씩 무엇을 씹는지 입맛을 쩍쩍 다신다. 짓궂은 시인은 그것을 단무지 한 조각 집어삼켰다고 슬쩍 눙을 친다. 이 시는 신생의 봄을 온통 노랑으로 물들여놓는다. 개나리도 노랗고 햇살도 노랗고, 단무지도 봄잠도 노랗다. 이래저래 ‘노란 날’(黃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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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