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지키며 신라문화예술의 수호자 역할을 했던 서양화가 김준식의 첫 회고전이 경주솔거미술관 제1,2 기획전시실에서 6월 24일까지 열린다. 경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재)문화엑스포와 (사)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가 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경주예술학교 창립의 주역인 서양화가 김준식을 종합적으로 재조명하는 의도로 기획됐다. ‘다보탑이 있는 풍경’, ‘노모상’, ‘향원정’, ‘숭혜전’등을 비롯해 관성 김준식 작품 28점과 함께 생전 친분과 교류가 깊었던 고암 이응로, 청강 김영기의 작품 1점씩을 포함, 총 30점의 평면작품과 관련 아카이브 50여 종을 선보인다. 제1 기획전시실에서는 일본 유학시기와 경주박물관 고적보존회 활동시기 등 해방 이전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으며 제2 기획전시실에는 경주예술학교와 계림대학 시기, 1973년 소품전 이후의 시기 등 후기작품들이 전시된다. 가정 형편이 유복했던 김준식은 경주에서 제일 처음 황오동에 화랑을 열었다. 여기에 출입하는 예술인들의 뒤치다꺼리도 마다하지 않고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중앙의 선배 화가들을 그의 집에 기거시키며 돌봐줬던 의리파였다. 일화로 50년대 대구에서 마산 출신 화가인 문신(文信)의 작품전시회가 열렸으나 작품매매가 안 되자 청마 유치환 선생이 주선해 경주 어느 다방에서 다시 전시회를 열게 했다. 이때 그가 문신의 대표작인 `생선`을 사주었는데 훗날 관성(김준식의 호)이 어려울 때 문신이 다른 사람을 통해 다시 그 자기작품을 구입하며 그가 보여준 의리에 고마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작품은 지금 `마산 문신 미술관`에 소장 돼 있다. 또한 고암 이응로, 청강 김영기 화백과는 서로 간에 그림을 주고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경주 중·고등학교에 재직 시에는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아 뉴욕과 춘천을 오가며 작업하는 경주 출신의 원로화가 김차섭 화백을 발굴, 서울대 진학을 위해 월전 장우성 화백에게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다고 김차섭 화백이 에세이집에 밝히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김준식의 작품과 더불어 유품과 자료들이 많이 비치돼 있어 그에 대한 갖가지 이력을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가 예상된다. 그가 자필 한자로 깨알같이 쓴 이력서는 물론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졸업증서, 결전미술전람회 특선상장, 경주고적보존회로부터 받은 사무위촉장등이 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 때 국민총력 경상북도 연맹회장으로부터 받은 상장 등도 있다. 해방되고 받은 경주예술학교장 임명장은 당시 종이가 귀한 탓인지 붉은 선이 그어진 편지지에 붓으로 임명사항만 간단히 쓰여있고 70여 년 전에 받은 `대한민국정부 문교부장관`명의의 초중교사자격증, 경주예술학교의 직인 등 여러 인장도 전시된다. 또한 1944년 경주고적보존회(경주박물관 전신)로부터 사무 위촉을 받아 신라문화유적에 관한 보존 체계화에 힘썼던 족적을 엿 볼 수 있는 신라와당 탁본 및 자료도 전시된다. 경주 주변의 유적과 풍경을 대상으로 그린 향토색 짙은 그림들과 이미 빛바래 낡아 버린 세월의 흔적들을 통해 지난 세월에 담긴 김준식의 혼과 열정, 더불어 경주 미술의 깊이를 느껴보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본다. 향토화가 김준식은 1919년 경주 성건동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 태평양미술학교 유학시절 이외는 경주를 떠나 산 적이 없는 화가이다. 경주 보통학교 때 미술대회에서 상장을 받는 등 어릴 때부터 미술재능이 돋보였다. 일본 유학이 끝나자 귀향해 당시 일본인 경주 박물관장과 함께 신라 고고미술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해방과 함께 결성된 경주예술가협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1946년 남한 최초의 예술대학격인 ‘경주예술학교’ 개교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초대 손일봉 교장에 이어 2대 교장직을 수행했다. 그 후 서라벌 미술가협회장, 한국미협 경주지부장, 경주예총 지부장, 신라문화제(8회)대회장을 역임하고 계속해서 한국미협 경주지부 고문으로 있으면서 오직 지역화단발전에 힘쓰며 경주에서만 살다간 미술인이었다. 또한 경주고적보존회(경주박물관 전신)로부터 사무 위촉을 받아(1944) 신라기와와 금석문의 탁본 및 자료 수집 등으로 신라문화유적에 관한 보존 체계화에 힘썼으며 그 후 여러 해 동안 석굴암의 석조물 구조연구에 매진한 향토사학인이기도 했다. 오로지 고향 경주를 사랑하고 경주문화예술의 부흥을 위해 살았던 김준식은 말년에 오랫 동안 병으로 고생하다 1992년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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