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언양 방면으로 가다보면 서남산 자락에 무신 최진립(崔震立,1568~1636)장군을 모신 용산서원(龍山書院)이 있다. 숙종년간 경진년(1700)에 숭렬사(崇烈祠)가 먼저 세워지고 신묘년(1711)에 ‘숭렬’이라 사액하였으며 이후 지역유림과 부윤의 공조로 서원으로 확대 운영하였다. 최진립의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로 경주최부자의 비조(鼻祖)가 되며 임진·병자 양란을 겪은 충절의 장수로 사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정무(貞武) 시호를 받았다. 『인조실록』에 “최진립은 무인(武人)으로서 몸가짐이 청렴하고 부지런하였다” 또 “무신(武臣) 최진립은 검소[간약(簡約)]하다”며 그의 검소한 행실을 칭송하였고 사후에는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최진립은 1623년 가덕진첨사(加德鎭僉使)를 거쳐 함경도 경흥부사(慶興府使)를 역임한 인연으로 사후 임신년(1692) 함경북도 경원(慶源)의 충렬사(忠烈祠)가 세워지고 호은(壺隱) 홍수주(洪受疇,1642~1704)가 김응하(金應河)ㆍ최진립(崔震立)을 위해 「충렬사축문」을 지었다. 경주의 용산서원은 당시 경주부윤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재임1699.8~1700.3)이 「용산사우상량문(龍山祠宇上樑文)」을 이어서 한명상(韓命相,재임1700.5~1702.6)은 「봉안제문(奉安祭文)」등 글을 지어 적극적으로 건립의지를 표명하였고 지역유림들과 밀접한 교유관계가 있었다. 또 후손인 운암 최신기(1673~1737)는 1713년 반구대 일원 대곡천의 수려한 경관에 집청정(集淸亭)을 지어 이형상. 식산 이만부(1664~1732). 청대 권상일(1679~1759). 남곡 권해(1639~1704). 우와 이덕표(1664~1745) 등 많은 시인묵객을 불러들여 교유하며 문인의 저변을 확대하였다. 게다가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은「서원기(書院記)」를 짓고 숭렬사우(崇烈祠宇) 편액 글씨는 이익의 형 옥동(玉洞) 이서(李漵,1662~1723)가 동국 진체로 썼으며 이처럼 다양한 문인 간 교유가 서원 곳곳에 흔적으로 남아있다.
ⓛ15년이 지난 경인년(1650)에 금상(효종)께서 즉위하시자 공의 예전 편비(褊裨)였던 김우적(金禹績) 등이 상소하기를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신하와 청렴한 관리 가운데 선조에서 시호(諡號)를 내리고 뒤늦게 녹훈한 적이 있으니 신의 옛 장수 최진립도 이에 견줄 수 있습니다”하였다. 상께서 이를 논의하게 하자 모두 옳다고 하였다. 봉상시(奉常寺:太常)에서 의논하여 시호를 ‘정무’로 하고 해당 부서에서는 또 청백리에 기록하였다.(『龍洲遺稿』卷15,「工曹參判貞武崔公墓碣銘 幷序」,“后十五年庚寅, 當今上初載, 公之舊日褊裨金禹績等上疏, 以爲死節之臣, 淸白之吏, 在先朝例有賜諡追錄之事. 臣之故將崔震立亦足爲比. 上下其議, 皆曰是. 太常議諡曰貞武, 該部又錄淸白.”)
②수사(水使) 신(臣) 최진립은 또 청백하고 국사에 몸을 바쳤다는 내용으로 향리에서 하소연하자 특별히 그들의 소청을 들어주었습니다.(『芝山集』『附錄』卷3,「請諡疏․顯宗癸卯十二月[金集胄]」,“水使臣崔震立, 又以其淸白死事, 部曲之呼籲, 而特準其請.”)
ⓛ은 용주(龍洲) 조경(趙絅,1586~1669)이 쓴 최진립의 묘갈명으로 1660년 김우적이 올린 상소의 내용에 청백리 기록이 등장한다. ②는 1663년 식암(息庵) 김석주(金錫胄,1634~1684)가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을 위해 시호를 청하는 글에서 앞서 최진립이 청백리에 녹선된 일을 언급하였으니, 1660년과 1663년 사이에 이미 최진립의 청백리 녹선 사실을 짐작케 한다. 또한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1674~1756)의 묘갈명에 드러난 선조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청백리 녹선과 후손 최진립이 청백리에 녹선된 일은 우연이 아닌 가학(家學)의 마땅한 경우로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대대로 경주의 최부자로 살아가는데 밑바탕이 되고 있다. 즉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장군은 선조의 유지를 잇고 가학을 계승하며 충절을 지켜온 명문가의 인물로 경주의 유학자 가운데 한명이기도 하다. 훗날 현손(玄孫)인 제암(霽巖) 최종겸(崔宗謙,1719~1792)은 이익을 찾아가 기문을 부탁하였으니 서원의 전말이 기문에 들어있다.
「숭렬사 강당기 中」- 근세에 경주 최 대부(大夫) 정무공은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바르고 당시의 처지가 지극히 어려웠는데 공이 수립한 바는 또 지극히 강건하고 위대하였다. 무릇 전후로 나라의 모든 화란(禍亂)에 반드시 검(劍)을 잡고 먼저 달려갔으며 달려가 싸워 죽지 않았을 때는 분발하는 뜻이 더욱 열렬하였다. 경기도 용인 험천의 전투 때에 정황이 암담하고 귀신도 놀라서 부르짖는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공은 결국 적의 칼날 아래 죽었다. 임금께서 이 사실을 들으시고 “나에게 훌륭한 신하가 있었다” 하였고, 정신(廷臣) 조사석(趙師錫,1632~1693)은 “나라에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하였으며, 아래로는 장사치와 어리석은 여자들까지도 모두 “철인(哲人)이 돌아가셨다”라 하였다. 당시에 이미 왕명으로 병조판서에 증직하고 정무의 시호를 내리고 숭렬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훗날 사람들이 경앙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자 많은 선비들이 모여서 별도로 당우(堂宇)를 건립해 모여서 강학하는 곳으로 삼고 용산서원이라 하였다.… 낙성한 뒤 정당(正堂)을 민고당(敏古堂), 동서의 두 협실(夾室)을 흥인당(興仁堂)·명의당(明義堂), 두 재(齋)를 호덕재(好德齋)·유예재(游藝齋), 누(樓)를 청풍루(淸風樓), 문을 식강문(植綱門)이라 편액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향선생(鄕先生)인 참의 정중기(鄭重器,1685~1757)가 명명한 것이다. 내[이익]가 예전에 가형(家兄)인 옥동 이서선생을 모시고 있을 적에 계림에서 온 선비가 숭렬사 편액의 대자(大字)를 써 주기를 청하였고 선생께서 기꺼이 응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星湖全集』卷53,「崇烈祠講堂記」,“近世雞林崔大夫貞武公, 天之所植者至正, 時之所蹈者至難, 而公之所樹立, 又至剛至大. 凡前後國家之禍亂, 必仗劒先赴, 赴而不死, 厲志愈烈. 至險川之役, 風雲黯慘鬼神驚呼, 而公則卒死於矢刃之下. 聖主聞之曰余有臣矣, 廷臣師錫曰國有人矣, 下至販夫愚婦, 莫不曰哲人亡矣. 當時已承命, 贈官兵曹判書, 贈諡貞武, 贈祠額崇烈. 後人心之景仰彌深, 多士濟濟, 別立堂宇, 爲聚集講學之所曰龍山書院. … 旣落成, 扁其正堂曰敏古, 東西兩夾曰興仁明義, 兩齋曰好德游藝, 樓曰淸風, 門曰植綱, 此皆鄕先生參議鄭公重器所命也. 瀷記昔往侍家兄玉洞先生座, 士有從雞林來者求寫扁額大字, 先生肯以從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