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를 불보(佛寶)사찰, 부처님의 모든 말씀 곧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를 법보(法寶)사찰, 훌륭한 스님을 많이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僧寶)사찰이라고 한다. 불(佛)·법(法)·승(僧) 삼보도 결국은 중생을 위한 것이라면 삼보사찰보다 더 의미가 있는 사찰이 중생사가 아닐까?
중생[衆生, sattva, living things]이란 인간을 비롯한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를 뜻하는 불교 용어로 의식을 지닌 존재인 모든 생물은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을 지닌다는 뜻으로 대승불교 경전인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하였다.
중생사란 이름을 가진 절이 더러 있다. 이곳 낭산을 비롯하여 서울 송파구, 경남 창녕과 남해, 제주 애월읍, 부산 서구에 각각 중생사가 있다. 그러나 모두가 최근에 조성된 사찰들이다. 낭산 기슭에 있는 현중생사가 신라시대의 중생사 자리에 세워진 절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경주의 어느 곳에서도 중생사라고 할 만 한 절터가 발견되지 않았고, 이 부근에서 출토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관음보살상이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는 중생사의 삼소관음일 가능성이 있는 등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신라시대의 중생사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중생사의 창건시기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문무왕 12년에 사천왕사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선덕여왕릉과 가깝다는 점에서 선덕여왕의 원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40년대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안순이라고 하는 보살이 이곳에 사찰을 건립하고 선덕사(善德寺) 혹은 선덕정사(善德精舍)라 하였다. 그녀가 사찰 이름을 이렇게 정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힌 사실은 없지만 선덕여왕릉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 약600m 지점에 있는 바위면에 부조로 조각된 본존인 피모(被帽)의 마애지장보살상을 왕관을 쓴 선덕여왕으로 보고, 무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양 협시의 신장상(神將像)은 선덕여왕을 좌우에서 모시는 무장(武將)으로 생각한 듯하다.
안순이보살은 1940년대 망덕사 서편의 논을 개간하면서 망덕사지 목탑 상륜부로 추정되는 석재를 수습하고, 또 1949년에는 배반동 주민들과 함께 선덕여왕릉을 보수하기도 하였다.
이후 어떤 이유에선지 안순이보살이 낭산 남쪽 마을로 새로운 개인사찰을 지어 옮겨가고 도문스님이 이를 인수하여 중생사라고 이름을 바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문스님은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활동하신 대종사로 이후에 부산 천마산에도 중생사를 열었다.
도문스님이 이곳 선덕사를 인수할 당시 현중생사 일대에서 발견된 여러 가지 유물 등을 근거로 이곳이 신라시대의 중생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여 사찰 이름을 현중생사로 바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1년 5월 14일자 시사IN에 도문스님과 법륜스님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1969년 겨울, 고등학교 1학년 최석호는 분황사에서 학기말 시험을 준비하다가 주지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그의 비상함을 눈여겨 보아왔다. 몇 번 출가를 권유했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과학자가 꿈인 최석호는 출가를 망설였다. 스님은 그런 최석호를 불러세웠다.
“너 어디서 왔어?”
“학교에서 왔습니다.”
“학교 오기 전에는?”
“예, 집에서 왔습니다.”
선문답이 계속 이어졌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는?”
“모르겠습니다.”
“그래, 너 어디로 갈 거니?”
“학교 도서관에 가야합니다.”
“도서관에 갔다가는?”
또 다시 선문답이 이어졌고, 최석호는 결국 “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죽은 뒤에는?”
“모르겠습니다.”
스님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야단쳤다.
“야 이놈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쁘긴 왜 바빠?”
깨달음의 죽비를 맞은 최석호는 이후 출가를 하게 된다. 당시 주지스님이 이곳 현중생사에 주석하신 적이 있는 도문스님이고, 최석호가 바로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