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에 이런 구절이 있다.
心不在焉(심부재언)이면 視而不見(시이불견)하며, 聽而不聞(청이불문)하며, 食而不知其味(식이부지기미)니라.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는 의미이다.
이번 중생사에 대해서는 우선 절터에서부터 꽉 막혀버렸다. 마음이 있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능지탑지의 오른쪽 갈림길에 ‘현중생사’라는 표지석이 있다. 옛 중생사 즉 진짜 중생사가 아님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능지탑 북쪽에 마애지장삼존불이 있고 근래에 지은 사찰이 있는데 이를 현중생사라고 한다. 그런데 중생사와 관련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삼소관음 중생사’가 유일하다. 이외에는 어느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이 부근에서 석조 불상 2구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삼소관음 중생사’에 기록된 관음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 하나만으로 이곳을 중생사지로 보기에는 무리이다. 일대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
1997년 5월, 현중생사로부터 약 100m 떨어진 곳에서 마을 농부가 밭 언덕에 목이 없는 불상이 파묻혀 있던 것을 발견하여 신고하였다. 이 관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큰 관음보살상이다. 대좌는 두 동강 난 채 밭두렁에 묻혀 있었다.
당시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마을 노인으로부터 이 근처에 있던 동강난 불상 머리를 오래 전에 박물관에서 가져갔다는 말을 기억하고 박물관에 전시된 많은 불상의 머리 중에 크기가 비슷한 것을 찾아 맞추어 높이 3.85m의 당당한 관음보살상을 복원하였다.
박물관 북편 뜰에 서 있는 이 관음보살상은 화려하나 측면에서 보면 구부정한 자세로 전체적인 조형미는 다소 미숙한 편이다. 자세는 정면에서 약간 왼쪽으로 틀어 율동감을 나타내었다. 머리에는 보관이 높이 솟아 있고 보관 아래에는 꽃무늬 태를 둘렀다. 큰 귀에 풍만한 얼굴로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가슴에는 영락이 드리워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 올리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 정병을 잡고 있다. 천의는 허리와 무릎에서 넓게 U자를 그리며 두텁게 드리워져 있다.
신라미술관 불교미술2실에는 중생사터로 알려진 곳에서 발굴된 11면 관음보살입상이 있다. 이 불상은 발굴 당시 왼팔이 어깨 부위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하체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 1917년 출판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이 불상은 삼존불 가운데 오른쪽 협시보살로 여겨지는데, 현재 본존불과 왼쪽 협시보살은 찾을 수 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정병(淨甁)을 든 왼팔은 복원된 것이 확실하고 왼발도 복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정수리의 불상 하나와 주위의 보살의 얼굴까지 합하여 총 11개의 얼굴이 있다고 하여 십일면관음보살상이라고 한다.
석불로 조성된 11면 관음보살상은 매우 귀하다. 석굴암 안에 있는 11면관음보살과 굴불사지 6비 11면 관음보살상, 그리고 이 11면 관음보살입상 딱 세 점뿐인데, 그 중 환조로 조성된 것은 이 불상이 유일하다.
관음보살은 관세음(觀世音)보살 또는 관자재(觀自在)보살이라고도 하는데, 무한한 자비의 힘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한다. 관세음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관자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하여 보살핀다는 뜻이다. 백의관음, 십일면관음, 천수관음 등이 있는데, 이는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마음속으로 관음보살을 간절하게 염원하면 불구덩이가 연못으로 변하고, 성난 파도가 잠잠해지며, 높은 산에서 떨어져도 공중에서 멈추게 된다고 한다. 또한 참수형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목을 치는 칼날이 부러지는 등 관음보살은 갖가지 재앙으로부터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요즈음 북핵문제, 경제문제 등으로 나라 안팎이 무척 어수선하다. 관음보살의 가피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