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우암 남구명(南九明)이 영덕에서 경주로 세거하면서, 조부 남국형(南國衡)·부친 남용만(南龍萬) 등이 고유(高儒)로 향촌의 주목을 받았고, 모친 역시 거유(巨儒)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의 따님으로, 남경채(南景采)·남경희(南景羲)·남경화(南景和) 3형제를 두었다. 치암(癡菴)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어려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만운(李萬運)·이기경(李基慶)·이우(李㙖)·한치응(韓致應)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 『치암문집』12권 6책이 전한다. 그는 1791년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보문동의 동쪽인 암곡동(暗谷洞)에 지연정사를 짓고, 6곡을 설정해 산수의 빼어남을 읊었다. 두 물줄기가 합수하는 1곡과 2곡에 해당하는 경주최씨의 정자 그리고 상류로 뇌담(雷潭)과 석장(石丈) 그리고 물과 바위의 아름다움을 거슬러 오르며 6곡의 서쪽에 지연정사가 있었다. 즉 치암의 6곡이 등장하는 글은 경주의 구곡문화형성과 구곡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며, 이후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1768~1844)의 「옥산구곡」, 건천출신 석강(石岡) 한문건(韓文健,1765~1850)의 「석강구곡가」, 창헌(蒼軒) 조우각(趙友慤,1765~1839)의 「옥산구곡」·「양동구곡」 등이 경주의 구곡문화를 대표하는 실정이다. 1975년 건설된 덕동댐은 수몰전 덕동-명실-시래골-큰마을-계정-큰기왓골-와동-왕산 등 상류로 오르면서 여러 마을이 있었고, 특히 계정은 시냇가에 지어진 정자로, 치암의 지연정에서 생겨난 말이다. 덕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해 상류쪽으로 500여m 떨어진 곳에 이건(보덕로 275-5)하였고, 지연정사와 부속건물 등이 있었으나 당시 지연정사만 옮겨졌다. 그는 지극히 선한 경지에 이르는(止於至善) 말씀을 부여잡고 또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정사를 짓고 평생을 살았으며, 계정의 수려한 산수에서 신선의 경지와 자연에 심취한 전원생활을 노래하였다. 특히 무엇보다도 산수에 대한 애정을 자산으로 활용하였으니, 지연정사가 대표적이며, 그의 산수관과 정사를 짓게 된 연유가 「지연정사기」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지연정사기」 동경의 동쪽 20리에 6곡의 시냇물이 있다. 두 시냇물이 합수하여 흐르는 곳이 제 1곡이다. 북쪽 시내를 따라 서쪽으로 꺾으면 병풍바위 아래에서 물을 마시는 거북형상을 볼 수 있고, 북쪽에 최공의 정자 아래에 이르면 깊은 못과 너럭바위가 있다. 또 북쪽에 깎아지른 절벽아래에 이르면 꾸불꾸불 흘러 소용돌이를 이루고, 또 동북쪽으로 가면 못을 이루는데, 물소리가 매우 웅장하여 뇌담(雷潭)이라 한다. 그 위에는 너럭바위[盤陀石]와 솟은 바위[高廩石]가 있고, 솟은 바위의 동쪽에 바위봉우리가 십여장 높이 솟았는데, 마치 갑옷과 투구를 쓴 듯 북쪽을 두르고 서있고, 봉우리 가운데 세 곳이 한결 높아서 석장(石丈)이라 한다. 석장 아래를 따라 북쪽으로 백여보를 가면 깎아지른 두 석벽이 있는데, 석벽은 매우 괴이하였고 물도 매우 맑았으니, 이곳이 제 6곡이다. 작은 배를 띄울만하였다. 그 서쪽에는 십여장의 병풍바위가, 동쪽에는 작은 땅[一畝:30평]이 있고, 내[치암옹]가 지연정사를 짓고 그곳에 살고 있다. 나 치암은 세상 물정에 어두워 일을 잘 알지 못했기에 스스로 호를 치암(癡庵)이라 하였다. 유독 산수를 좋아하여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다고 들으면 번번이 홀로 다녀왔으며, 그 가운데 가장 깊이 좋아한 것이 이곳만 함이 없었다. 부친[先君子]께서 자주 임해 감상하며 “가히 집을 지을만한 곳이나, 어찌 나의 세대에 미치겠는가?”라 하셨고, 매번 집을 짓는 제도는 곱자[曲尺]와 같으며 “한칸짜리 집[室]과 두칸짜리 집[堂]은 서쪽으로 계곡에 임하고, 두칸짜리 집[室]과 한칸짜리 집[堂]은 남쪽으로 연못과 마주하고, 남북쪽에는 연못을 만들 만하다.”라 가르쳐 주셨다. 이윽고 선인(선친)께서 돌아가시자 어버이를 사모함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워, 초상을 마치고는 가솔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신해년(1791) 우관(郵官;역참관원)의 박봉(薄俸)으로 5칸의 집을 지으며, 선인께서 지시하여 가리켜주는 것을 대략 따랐다. 그런데 남북쪽의 못이 이듬해 그 서북쪽이 물에 쓸려 집이 기울고 북쪽 못이 없어졌고, 을묘년(1795) 2칸 집이 화재가 나서 검게 거슬린 오두막만 겨우 남아 보는 자들이 불쌍히 여겼다. 신유년(1801) 가을 8월에 비로소 철거하고 새로이 지었는데, 친구 간에 비용을 내고 이웃마을에서 힘을 보태어 3개월 만에 일을 끝마쳤고, 집을 남쪽으로 수십보를 옮겨 모두 돌기둥으로 이었고, 집들을 높게 해서 재앙이 없게 하였다. 동쪽에 1칸을 더해서 선인의 행실에 뜻을 두어 3곳의 집[室]에 각각 이름을 두었다. 동쪽의 금서관(琴書館)·서쪽의 유정료(幽靜寮)·남쪽의 침수재(枕漱齋)를 통틀어 지연정사라 하였다. 남쪽 못을 수리해 넓히고, 돌을 짜 맞추듯 쌓아 섬을 만들었다. 나[치암옹]는 작은 배를 타고 그 사이를 돌았으니 노닐기에 매우 좋았다. 간혹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도 종일 찾아오는 이 없고, 시를 읊조리고 담박한 벗과 화음하며, 책을 읽고 석장의 끝에서 소요하며 회포를 풀고, 기이한 꽃과 아름다운 나무가 자태를 헌신하여 스스로 그 그윽하고 적막함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 늙은이의 이른바 6가지 어리석음의 하나이면서 정사를 지은 까닭이다. 무릇 천지간에 사물은 각각 주인이 있으니, 정사 전체는 하늘이 짓고 땅이 낳은 것이 은자․처사와 함께하기에 적당하고, 예로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것이 마침내 나[치옹]와 우연히 함께하였으니 어째서인가? 어떤 사람은 종이를 만드는 자가 일찍이 살았기에 지연(紙淵)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지혜와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 하여 지연(智淵)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연못은 물이 머무는 곳이라 지연(止淵)이라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다. 부친께서 불초한 제게 말씀하시길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지극히 선(善)한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연못의 체함(體陷)은 가의(賈誼)가 이른바 ‘구덩이를 만나면 그친다.’하였고, 또한 가야 할 때에 가고, 그쳐야 할 때에 그침은 성인께서도 그러하셨다. 예로부터 그침을 알지 못해 패한 자들이 서로 이어지고, 경거망동(輕擧妄動)하여 패하기보다는 융통성 없이 지켜서 근심이 없는 것과 어찌 같겠는가? 너는 밖으로는 부귀의 상이 없고, 안으로는 경제의 갖추어짐이 없으니, 지연(止淵)에서 몸을 마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느냐?”라 하셨다. 나는 삼가 이 말씀을 받들고 감히 잊지 않았다. 무릇 지[止]의 뜻이 크고, 『주역』에서 산(山)의 의미를 겸하고, 『대학』에서 지선(止善)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니, 앞으로 나는 미칠 수 있는 것에만 말할 것이기 때문에 우감(遇坎)에서 뜻을 취해서 이곳의 이름을 정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늙고 또 병들어 장차 이곳에서 몸을 마칠 것이나 선인의 말씀 가운데 만일 미리 헤아려 명(命)함이 있다면 내 그와 같은 경우 그칠 바를 알 것이리라. 마침내 영구한 맹세의 말씀을 글로 적어 정사에 걸고, 또 풍수지감(風樹之感:어버이가 돌아가시어 효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슬픔)의 거처로 삼노라. 정사가 다시 완성된 6년 정묘년(1807) 사월 아침에 적다. (번역:경북고전번역연구원 원장 오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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