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 한다. 절대로 말이다. 만약 내 키가 170cm라고 하자. 내 키가 얼마나 큰지, 또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자체로는 알 수 없다. 182cm인 조카보다는 작고 157cm인 아내보다는 크다는 걸로 ‘아, 내 키가 이 정도구나’ 비로소 감을 잡는다. ‘대상’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격이 불같은 사람을 겪어봐야 우유부단할지는 몰라도 느긋한 우리 남편 성격이 좋다는 걸 알게 되고, 내 남자친구 얼굴이 심각(!)하니까 탤런트 장동건이 이상형이 되는 것이다.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무서운 비유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비교를 통한 이해, 이것은 이 세상이 돌아가는 황금 법칙이다.
이처럼 ‘비교’를 통해 대상을 이해하는 구조이지만 변주가 없지는 않다. 영하 10도는 영상 10도에 비하면 엄청 춥지만, 영하 30도에 비하면 차라리 따뜻하니 말이다. 죽염을 뿌리면 짤 것 같은 수박이 오히려 더 달게 느껴지는 것도 비교가 가지는 ‘상대성’이다. 어쨌든 세상은 비교를 통해야만 인식(認識)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비로소 인식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였나, 시인 김춘수의 《꽃》이라는 작품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여기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가 바로 그 대목이다. 이 세상의 이치를 누구보다도 잘 노래한 시(詩)다.
흔히 이 세상을 사바(娑婆)세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멀쩡한 내 가방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지나가는 아줌마 손에 들린 명품 가방을 보는 순간이고, 신호가 바뀌자마자 슝~하고 저 멀리 내빼는 외제차를 발견하는 순간, 잘 나가던 내 차는 갑자기 굼벵이가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행복과 불행이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행과 불행, 좋고 나쁨이 만들어지는 장(場)이 사바세계이다. ‘비교’라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판단 때문에 이 세상은 번뇌와 고통으로 탁한 세상[濁世]이 되는 것이다.
자, 그럼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과연 사바세계에 얼마나 최적화 되었는지, 또한 얼마나 익숙한지 실험을 하나 해보도록 하자. 먼저 시계 하나를 준비한다. 초침이든 숫자든 큼직큼직한 벽시계도 괜찮고 손목시계라도 무방하다. 시계가 준비되었다면 본격적인 실험으로 넘어간다. 심호흡을 몇 번 해서 마음을 안정시킨 다음 자, 이제 초침을 바라보라. 그러면서 당신 자신을 의식해 보는 거다. 가령 ‘나는 박○○다.’, ‘나는 지금 내 방에 있다.’ 등의 생각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쉽다. 아주 쉬운 실험이다. 그저 단순히 초침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당신 자신과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존재와 당신이 있는 장소를 자각하면 된다. 이게 실험의 다다.
뭔가 고도로 복잡하고 중요한 실험을 예상했다면 싱거울 수 있다. 하지만 간단한 실험치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냉혹하다. ‘만약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아마 최대 2분 정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당신(자신에 집중한) 의식의 한계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타인과의 ‘비교’ 없이 순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집중’의 최대 시간이 2분이라는 말이다. 설마 그럴라고? 하는 의심에 다시 해보면 안다. 이번에는 먼저 때보다 집중 시간이 더 짧아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 누구나 손에 쥔 하얀 솜사탕 하나로도 온종일 행복했던 시절이 있다. 어린 우리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온통 달달한 하얀 솜사탕이라서 그랬던 거 아닐까 싶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나와 대상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순간 우리는 지극한 행복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아주 나중에서야, 비교하는 습관에 이골이 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