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한 삭풍이 불어재꼈던 올해 긴 겨울도 마침내 종지부를 찍나 봅니다. 유난스레 볕이 따스한, 그래서 ‘햇빛마을’로 불리는 동남산 가는 길의 인왕동 양지마을에는 고청 윤경렬 선생(1916∼1999)의 고택이 있습니다. ‘고청정사(古靑亭舍)’라는 당호를 가지고 있는 이 고택에 경주에서 나고 자란 이 뿐만 아니라 경주를 아끼는 외지인들도 다녀가고 있습니다. 기자도 일탈보다는 수위가 살짝 낮은(?) 일종의 오수와도 같은 휴식을 선사하는 공간을 즐기고 싶을때 이 마을을 찾곤 했습니다. 신라문화를 사랑하고 경주를 사랑한 향토사학자이신 고청 선생은 ‘영원한 신라인’으로 불립니다. 고청 선생의 숨결이 살아있는 고택의 사랑채에는 고청 선생의 생전 사진과 자화상을 비롯한 유화작품과 토용들이 아직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청정사는 1971년 지어졌으니 어느새 50여 년이 흘렀군요. 고청 선생이 남기고 간 가장 큰 유산인 경주의 혼과 신라의 숨결을 이어가며 고택에 살고 있는 자제이신 윤광주 선생의 행보 덕분일까요? 윤광주 선생은 경주읍성 재현 등 문화재 복원 및 복제 사업 관련에 매진하고 계시지요. 고청정사는 시간성에 비해 고색이 짙어 보입니다. 고청 선생의 삶과 함께 윤광주 선생의 삶의 여정이 함께 녹아 흐르는 이 고택은 그래서 더욱 풍성한 감성이 연장돼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 양지마을에 터를 잡은 것은 생전에 고청 선생의 바람(‘경주에서 꼭 살고 싶은 곳이 양지마을이다’)을 자제이신 윤광주 선생이 부친의 뜻을 존중해 토용공방과 살림집으로 지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고청 선생은 이 집을 검소하게 지어야 한다는 것을 중요한 원칙으로 꼽았다고 합니다. 처마 끝을 위로 들어 올려 모양이 나게 하는 부연 등을 달지 않은 것도 집이 화려해지는 것을 경계한 것에 연유합니다. 특히 고청 선생께선 어린이나 학생들이 자주 찾아와 공부하는 것을 반영해, 그들에게 강연하기 좋도록 마루를 최대한 넓히고 방을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고청 선생의 후진사랑이 이 집에서도 빛나고 있는 것이지요. 또 연화문 수막새 등 기와의 막새들은 직접 구워 썼다는군요. 윤광주 선생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당시, 집 앞에는 온통 대나무 밭이었고 상서장에서부터 이어지는 갯버들 고목들이 즐비해 경치가 매우 좋았지요. 지금은 모래가 형편없지만 ‘문천도사(남천의 물은 아래로 흐르는데 모래는 위로 굴러가는구나)’ 등으로 표현되고 경주 8괴에 들어갈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모래밭에 학들도 서식하고 있었다오” 최근 이곳의 지세와 지형이 아름다워선지 자작나무로 치장한 북유럽 스타일의 커피전문집도 바로 고택옆에 들어서 있습니다. 다소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양새의 커피집의 위세가 당당한 가운데 여전히 고청정사에는 고택만의 아우라가 깊이 침잠하고 있습니다. 이 고택 정원 밖에는 고청 선생이 산에서 캐다 심은 산벚나무와 교동에서 옮겨온 탱자가 이제는 고목이 돼있습니다. 정원에는 고청 선생이 직접 심은 모란을 비롯해 옥매화, 홍매화가 곧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그림=김호연 화백글=선애경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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