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은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 열흘 안에 고문의 바깥뜰[庫門外庭]에서 서국(西國)식으로 화장을 하라’고 하였다. 서국은 인도를 지칭하고, 고문이 글자 그대로 창고의 문이라면 『삼국유사』 「기이」편 ‘만파식적’조에 ‘월성천존고’라는 창고의 기록이 있으나 이런 류의 창고 문은 아님이 분명하다. 『삼국사기』에는 궁궐의 남문·북문·현덕문·무평문·준례문 등의 기록이 있고, 또, 금성의 동문·서문·북문·남문, 그리고 월지에 있었던 문으로 추정되는 임해문과 인화문의 기록이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귀정문·동문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고문’이라는 기록은 없다. 중국 역대 왕조의 도성 건설에 기본이 되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의하면 제왕의 궁궐에는 고문(庫門)·치문(雉門)·노문(路門) 세 개의 문이 있다. 고문은 이 3개의 문 중 가장 바깥쪽이라니 이곳 능지탑지가 ‘고문의 바깥 뜰’이 아닐까? 하지만 월성의 정문은 당시 서문인 귀정문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만약 고문이 있었다면 귀정문의 서쪽이어야 할 것이다. 능지탑을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정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화장지일지도 모른다는 언급이 있었고, 1970년대 능지탑 발굴조사에서 까맣게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능지탑이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능시탑(陵屍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으로 전해오고 있는 것도 화장터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또 부근에서 문무왕의 비편이 수습되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곳 능지탑을 문무왕의 화장터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의 재위기간은 21년간으로 되어 있으나 생년이나 수명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단지 문무대왕비문에 왕이 죽었을 때 56세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로서는 단명했다고 할 수 없겠으나 삼국통일을 완성한 군주로 신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재위 기간이 무척 아쉽다. 임종을 앞두고 왕이 남긴 유언은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과인은 운명적으로 어지러운 때에 태어나 자주 전쟁을 치렀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토벌하여 영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는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遠近)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夫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고, 안팎으로 고르게 벼슬을 내렸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납세와 부역을 줄여 백성들로 하여금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부담을 지운 일이 없었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으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접어드는 이때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빛난 덕을 쌓아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이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고문(庫門) 바깥뜰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는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소속 관원은 이를 시행하라!”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는 그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즉위 초부터 70여 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을 하려고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되는 비밀스러운 장치도 갖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74년 1호 갱 발굴 후 지금까지 3호까지 발견되었는데, 현재 각 갱마다 모두 8000여 구의 병마용과 100여 개의 전차, 그리고 400여 구의 기마상이 전시되어 있다. 2009년 현지를 답사하고는 오싹 소름이 끼쳤던 기억에 지금도 전율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 국가를 이룬 문무대왕은 장례절차를 검소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수고를 끼치는 일을 하지 말도록 엄격하게 당부하고 있다. 이에 중국 진나라는 16년 만에 패망하였으나 문무왕과 같은 성군(聖君)이 다스린 신라는 천년 동안 사직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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