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쇠 나무-권주열이른 봄 나무들이산 채로목에 빨대가꽂혀 있다지하 컴컴한 곳에발을 묻고꼼짝달싹 못 하는저 생生을 향해우리는 떼지어 몰려들었다하지만아무도 검은 망토를 걸치지 않았다피를 마시며종일 놀다가어둑어둑 산을 내려와다시관속에 드러눕는다.-나와 타자의 하나 되기에 대한 일갈우수에서 경칩으로 접어드는 시절이다. 먼 산에서 블루베리 농사를 하는 친구로부터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천지가 해빙이 되는 추운 겨울의 끝 무렵에 먹는 게 고로쇠 수액이다. 나무 줄기에 드릴로 구멍을 내어 그 상처에 호스로 물을 받는다. 그런데, 이 시를 읽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지하 컴컴한 곳에/발을 묻고/꼼짝달싹 못하는” 나무를 향해 우리는 떼로 몰려들어 그 ‘피’를 나눠마신다. 죽어가는 그에 대한 경건한 조의(弔意)도 없이(“하지만/아무도 검은 망토를 걸치지 않았다”). 우리는 그 피를 달다고 하면서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하루 종일 흥청거리며 논다. 거기까지는 저들만 아는 인간들의 행태에 대한 비판의 시로만 읽힌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은 그 경지를 넘어선다. 시인은 본질을 뚫는다. 냉소적인 시각까지가 더해진다. “다시/관속에 드러눕는다.” 그렇다. 우리는 밤마다 관속에 드러누워 있다가 낮에는 돌아다니는 좀비인가. 인간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죽음’인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사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다. 일신의 안위나 건강만을 챙기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는 말은 일찍이 오규원이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라는 시에서 “건강이 제일이지/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는 일상인의 삶을 통해 드러내기도 했다. 더 이상 죽었는 줄도 모르고 날마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지 말자. 더 이상 관속에서 일어나지 말자. 건강보다 더 필요한 것, 나와 타자의 하나 되기를 생각 좀 하라고 이 시는 우리에게 일갈하고 있다.------------------------------------------------------------------------------------------------------------손진은 시인 약력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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