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고건축을 하며 발굴 경험을 쌓은 청년. 그는 1959년 한국에 돌아와 국립박물관 학예연구관으로 국내 유적 조사와 발굴에 뛰어든다. 한국에서의 첫 발굴은 경주 감은사터. 신라 문무왕의 유언을 금당터 기단 아래 용혈구멍으로 실증한 이 발굴은 우리 기술과 인력으로 이뤄낸 최초의 고고학 조사였다. 고고학계 역사적 첫 발굴을 시작으로 그는 40여 년 간 전국 곳곳에 잠들어있던 고대의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했다. 그는 바로 창산(昌山) 故 김정기 박사(1930∼2015)다. 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정기 박사. 한국 고고학과 고건축사 분야의 대부, ‘한국의 발굴왕’...,그를 수식하는 수사들이 다양하다. 경주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은 많다. 그 중에서도 김정기 박사의 경주유적발굴에서의 혁혁한 기여는 분명하게 재조명돼야 할만큼 값지다. 경주 중요 유적들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의 정신이 집약된 천년 경주의 문화유산을 역사적 풍치와 조화롭게 가꾸고, 고도의 기품을 재현해 민족문화를 선양한 이다. 1962년 숭례문 해체복원, 1970년대 불국사 복원, 천마총·황남대총·안압지·황룡사지 발굴, 1980년대 익산 미륵사지 발굴 등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대규모 신라 유적들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1987년 국립문화재연구소를 떠난 뒤에도 문화재보호재단 단장직을 역임하며 문화재 곁을 떠나지 않은 김정기 박사는 평생을 우리 문화재 발굴과 보존에 힘쓴 ‘발굴의 제왕’이자 한국 고고학·고건축의 거목이었다. 그의 업적은 어느 한 지역에 국한할 수 없을만큼 지대하고 방대하겠지만 경주에서의 발굴 성과와 공로를 중심으로 조명해보았다. 이 기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학예실장과 정대홍 학예연구사의 적극적인 자료 제공(학술회의 자료집 ‘한국 문화유적 조사·연구의 개척과 창산 김정기’와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식지 23호(초대 김정기 소장님 추모특집)’ 및 사진자료 포함)과 협조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황남대총과 황룡사지, 안압지 등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경주지역 대부분 유적 등 중요한 발굴 사업 진두지휘 김정기 박사는 1956년 일본 메이지대학 공학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공학사학위를 취득한다. 1959년 귀국해 국립중앙박물관 보급과 학예연구관에 신규임용돼 인연을 맺은 후 문화재관리국을 거쳐 문화재연구소초대 소장을 역임하면서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건축과 고고분야에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일제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유적발굴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1960년대부터 개발계획으로 인해 대규모 유적발굴이 시행되는 1970년대 유적발굴을 이끌었다. 1959년 말, 우리나라 기술과 인력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유적 발굴은 경주 감은사지 발굴이었다. 이를 주도한 장본인이 김정기 박사였다.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 때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개발과 문화유산 보존의 조화를 언급할 정도로 신념이 강했고, 이를 수긍한 박 대통령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1975년 문화재관리국(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초대 소장 재임 시절 그는 황남대총과 황룡사지, 안압지 등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경주지역 대부분 유적을 비롯해 익사 미륵사지 등 중요한 발굴 사업을 진두지휘한다. 그뿐만 아니라 현장고고학과 건축학의 기초를 세워 일제가 아닌 자생적인 학문의 토대를 구축하고 후학 양성에도 이바지했다. 이 당시 국립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 그리고 학계에서 김 박사를 고고학과 고건축 분야의 대부라 일컬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고고학과 고건축학의 산 증인이었던 그는 동료, 후배, 제자들과 40여 년에 걸쳐 유적발굴과 연구에 매진했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 퇴임 후 연구발전 격려를 위해 창산문화재 학술상을 마련하는 등 인재양성에도 꾸준히 애정을 보였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유적을 발굴한다’, ‘한국의 고건축’ 등이 있다. 2015년 8월, 타계한 뒤 그 해 10월, 은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한편, 지난해 8월, 창산 김정기 박사의 저작집이 완간됐다. 이에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김정기 박사가 쓴 고고학·건축학 분야의 논문 100여 편을 모은 3권짜리 저작집 완간을 기념해 ‘한국 문화유적 조사·연구의 개척과 창산 김정기’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연 바 있다. -‘한국의 발굴왕으로 불렸고, 그렇게 인정받는 것을 스스로도 즐겼다’ 숭실대학교 최병현 명예교수는 ‘발굴왕, 김정기!’라는 추모글에서 ‘소장님은 한국의 발굴왕으로 불렸고, 그렇게 인정받는 것을 스스로도 즐겼다’고 했다. ‘1969년 문화재관리국에 문화재연구실이 생기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주요 유적의 발굴은 국립박물관의 몫이었다. 1959년 국립박물관의 본격적인 발굴은 김정기 소장님이 귀국한 이후 이루어졌다. 그 기간 국립박물관 발굴의 보고서에서 공식적으로 김정기란 이름을 찾기는 어렵지만, 발굴조사의 실무는 실질적으로 거의 다 그의 담당이어서 그때부터 이미 타칭 자칭 ‘발굴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 고고학 야외조사에서 시굴과 발굴의 절차, 발굴 기법의 적용, 토층조사, 현장 실측도 작성 등이 모두 그에게서 시작되었음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술회하고 있다. 최 교수는 발굴왕 밑에서 배울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들은 옮겨놓고 싶다면서 ‘발굴에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똑같은 발굴은 없다, 천 번을 발굴했어도 새 유적 발굴은 항상 초심자여야, 유구는 나오는대로 파고 나오는대로 해석해라, 발굴자에게 흥분은 금물, 땅을 파다 중요유물이 비치면 거기는 덮어놓고 멀리서부터 조사해 들어가라, 빨리 보고싶어 ‘헤비작거리면’ 그 유물도 망치고 주변유물도 망친다. 한번 파낸 흙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기억했다. 또 ‘소장님은 금관을 두 개나 발굴했지만 그것 보고 흥분하지도 않았고, 당신이 직접 다 작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 한번, 천마도 장니 발굴 때는 긴장하고 흥분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고도 했다. -‘황남대총 발굴은 우리나라 고분 발굴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과학적 발굴 사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이주헌 소장은 ‘발굴왕 창산 김정기박사와 한국고고학’ 이라는 주제발표에서 ‘그는 유적을 발굴조사하면서 항시 주의해야 할 것으로 조사 대상유적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발굴하고, 조사 경과와 결과를 빠짐없이 기록해 둘 것을 강조했다. 한편,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수립돼 미추왕릉지구 고분군 정화 및 고분공원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98호분(황남대총)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그 내부를 공개할 수 있도록 복원한다는 추진계획이 정부 주도하에 급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즉각 제동을 걸며, 먼저 소형의 완형분에 대한 발굴경험을 축적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대형고분인 황남대총의 발굴조사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자는 수정안을 창산이 제안했다’고 한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그의 의견을 적극 받아들여 황남동 155호분(천마총)에 대한 발굴조사를 먼저 실시하고 금관을 비롯해 1만15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다수의 금, 은제 유물과 ‘천마도’가 확인돼 학계는 물론이고 일반인의 관심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또한, 1973년 7월부터 착수한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의 발굴은 우리나라 고분 발굴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과학적 발굴 사례로 유명하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추진된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조사는 거대한 봉분을 갖춘 고총고분에 대한 치밀한 계획과 출토유물에 대한 과학적 보존처리를 유기적으로 실시해 국가직영 발굴조사의 신뢰성을 높이고 국내 학술발굴조사 과정을 체계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국립박물관 중심의 소규모적인 단기 발굴과 긴급 유물수습조사에 머물렀던 당시 문화재 조사의 틀을 바꾸고,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신라고고학의 학문적 수준과 연구 영역을 급속도로 확장시킨 효과를 동시에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은 아마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술요원의 우선적 확보와 최신기기의 도입으로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문화재연구소 자체적으로 출토유물의 대부분을 처리할 수 있도록 했으며, 처리 기술 능력도 또한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하는데 노력을 더욱 기울이게 되었다. 또 발굴왕으로서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60여 년 전 불모지와도 같았던 초창기 한국 고고학의 어려운 상황에서 청춘을 불태우며 활동한 다른 선학들과 함께, 한국 고고학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그가 남긴 업적은 한국 고고학사에서 지워지지 않는 큰 흔적으로 기억될 것’이라면서 유적 발굴조사 현장에서 몸소 실천한 그의 발굴 철학은 영원히 숨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발굴은 자꾸하면 다 없어진다’...신중하고도 철저한 조사 당부한 것이‘마지막’ 2007년 쪽샘 개토제부터 김 박사를 모셨다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박윤정 학예연구실장은 “김정기 박사님은 초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역임하시며, 경주 고적조사단장을 맡으셔서 불국사, 황룡사, 대릉원, 안압지 등 경주의 중요 유적들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한 장본인이십니다. 발굴현장에서 그리드법 등 현대적 기법을 적용해 발굴을 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박사님은 경주에 오시는 걸 무척 좋아하셨고, 발굴현장 보시는 걸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2015년 안압지발굴 40주년을 준비하면서 뵈었던 선생님의 모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발굴은 자꾸하면 다 없어진다’며 신중하고도 철저한 조사를 당부한 것이 제가 선생님께 들은 마지막 말씀이었죠. 그 말씀은 지금 경주에서 월성, 쪽샘, 동궁과월지, 황룡사를 발굴조사하고 있는 제게는 소명과도 같은 말씀으로 되새기고 있습니다”라며 김 박사의 업적이 특히, 경주에서 제대로 조명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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