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지구가 멸망해 다른 별로 가야 한다면 무엇을 가져가겠습니까?”
어떤 기자의 물음에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효(孝)와 아름다운 한국의 가족제도를 포함시킬 것입니다”
미국에서 4년 여 만에 귀국한 아들과 설날에 다니러 온 딸, 사위들과 더불어 명절을 보냈다. 자식들로부터 살가운 대접을 받은 적은 없으나, 모처럼 만나는 가족이 그냥 좋았다. 그래서 토인비의 이 말에 공감을 느낀다. 더구나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무엇보다 가족이 소중하다.
자식들이 모두 자기네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나니 허전하다. 마음을 달래고자 카메라를 들고 능지탑을 찾아 집을 나섰다.
경상북도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된 능지탑(陵只塔 혹은 陵旨塔)은 낭산 서쪽 기슭에 있는데 주변 마을에서는 능시탑(陵屍塔) 또는 연화탑(蓮華塔)이라고도 한다.
먼저 국립경주박물관에 들러 능지탑 유물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곳에서 출토된 소조불상의 파편은 신라미술관 불교미술 제1실에 전시되어 있다. 결가부좌한 다리, 코와 귀 등 신체 각 부위의 극히 일부 조각들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으나 불상의 전모를 파악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
박물관을 나와 능지탑지로 향했다. 울산으로 향하는 7번 국도는 항상 차들로 붐비는데 오늘은 명절 뒤라 더 통행량이 많다. 배반사거리에서 300여 미터 거리이지만 능지탑은 도로 왼쪽인데 좌회전이 불가능하여 신문왕릉까지 가서 돌아와야 한다.
탑 주위는 개발 제한 지역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퇴락한 건물이 오늘 날씨처럼 우중충하다.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낭산 서쪽 기슭에 있는 이곳 능지탑은 지대석 위에 2층탑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아래층 옥신 각 면은 한 변이 23.3m, 높이 약 1.9m인데, 동서남북 각 면에 3구씩의 십이지상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입구인 남면에 뱀[巳]상과 동면 범[寅], 용[辰]상이 결실되어 새 석재로 보충하였다. 이 십이지신상 중에서 북면 중앙의 쥐상은 이빨을 드러내고 왼손에 칼을 쥐었는데 오른손을 옷자락에 감추고 있다. 이빨이 표현된 점으로 미루어 이 상은 범상일 가능성이 높고 또 다른 상과 달리 평복을 입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길고 가는 편이다. 이외에도 이들 십이지상 중 일부는 양식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옥개석 부분은 위를 잔디로 덮고 옥개받침은 높이 60cm 정도의 복련 연화석 여러 매를 둘렀는데 폭이 일정하지 않다. 상층 옥신은 한 변 길이가 12m, 높이 70cm이며, 옥개는 사모지붕처럼 마감하고 중심부에 자연석을 마치 보주(寶珠)처럼 사용하였다.
능지탑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1차 조사가 있었는데 당시 ‘조선고적연구회’ 명의로 발간된 보고서에서는 이곳이 화장지(火葬地)일지도 모른다는 언급이 있었다.
광복 이후 무너진 채 1층 탑신 일부와 기단 약간만이 돌무더기처럼 버려져 있던 것을 1969년 이래 1971년까지 4차에 걸쳐 신라삼산조사단(新羅三山調査團)에서 조사를 하고, 이어서 1975년 본격적인 해체·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결과 정사각형 석단 중앙부에 찰주석이 지층 아래까지 세워져 있고, 찰주석 아래에는 공간을 포함한 토석 유구가 있으며, 토석 유구와 주변 지층이 까맣게 그을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화장묘(火葬墓)로 추정되었다. 원래 창건 당시에는 목조건물로 된 묘가 있었으나 이것이 언제인가 소실되자 이 화장묘를 보존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외부에 정사각형 석단을 축조한 것으로 보고 이를 문무대왕의 화장 장소로 비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탑 기단 내부에서 소조(塑造) 불상의 파편 여러 개와 수많은 와전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통일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서, 현재의 석단 이전에 창건된 건물, 즉 문무왕의 탑묘(塔廟)에 쓰였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학술적으로는 이른바 방단형석탑(方壇形石塔)으로 분류되고 있는 이 탑은 원래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지금과 같은 규모의 평면에 5층으로 쌓아올린 석조 축단형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현재 탑의 뒤쪽에는 보수할 때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구명되지 않은 토단 유구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