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손곡동에 위치한 자희옹 최치덕(1699~1770)의 종오정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처사문인 밀양박씨 지당 박만흥[1678~1742. 자 흥여(興汝)]의 소담한 요수재가 등장한다.
종오정과 요수재는 18세기 중엽 동시기에 건립된 건축물로 손곡동의 중요한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다. 박만흥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 박언침(朴彦沈)의 후손이자, 고려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박언부(朴彦浮)의 18세손으로, 어려서 박나헌(朴懶軒)과 정졸재(貞拙齋) 이하원(李夏源,1664~1747)에게 수학하며 퇴계의 정학(正學)을 계승했다. 당시 경신(1680)·기사(1689)·갑술환국(1694) 등 당쟁이 극심하고, 신임옥사를 거치면서 노론일당전제로 바뀌면서 특히 영남의 정치적 탄압은 더욱 심해져 영남의 선비들은 정계에 나아가기 어려운 상황에, 그는 시류(時流)에 따라 부모의 효행과 수신강학을 행하며 평생을 처사문인으로 살았다. 사후에 행적이 알려져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됐다.
요수재(樂水齋)는 그의 당호(堂號)로, 1709년 박만흥이 필선(弼善)을 역임한 박태동(朴台東, 1661~?)에게 기문을 요청했고, 『논어』「옹야(雍也)」,“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인자한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인자한 사람은 장수한다.(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에서 ‘지자요수’처럼 후손들이 흐르는 물을 닮아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는 긴요한 뜻을 ‘요수재’에 담았다.
「요수재기(樂水齋記)」에 “동도의 박·석·김 세 왕이 도읍한 곳은 이름난 산과 큰 내가 많고, 고을의 동쪽 20리쯤에 산봉우리가 웅장하고 계곡물은 맑고 푸르며, 그 가운데 한 신비한 구역 ‘손곡’이 있었으니, 밀양박씨 박만흥 흥여가 그곳에 살았다. 박흥여는 인도(仁道)에 가까운 자태로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고, 집안의 일을 다스리고 세상살이에 대한 온갖 생각을 잊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족 간에 화목하며, 의관을 바르게 하고 안색을 반듯하게 하며, 옛사람의 책을 읽고 옛사람의 행실을 행하는 진실로 지금 세상의 빼어난 선비였다. 따라서 치업(治業)의 장소에 ‘요수재’라 편액하였다. … 사람이 지혜롭지 않으면 나가서는 나라의 인물 되기가 불가하고, 들어가서는 집안을 다스리기도 불가하거늘, 지금 그대는 부모를 효로써 섬기고, 친족 간에 화목하게 하여 능히 집안을 다스리고 도를 아는 자이니, 그 지혜로운 자의 무리가 아니겠는가? 훗날 그대의 후손들이 능히 이 이름을 깊이 인정하여 대대로 물을 좋아한다면 ‘요수’ 두 글자가 장차 그대 집안의 하나의 비법이 될 것이다.
(『智堂實記』卷2,「樂水齋記」,“東都三姓受禪之地, 多名山大川, 治東二十里許, 峯巒雄偉, 溪水澄碧, 其中有一靈區曰蓀谷. 宗君興汝甫居焉. 君以近仁之姿, 早有向學之志, 撥家務, 忘世念, 而事親孝, 處族睦, 整衣冠, 尊瞻視, 讀古人書, 行古人行, 眞今世之逸士也. 扁治業之所曰樂水. … 人而不智, 出不可以爲國, 入不可以齊家. 今君事親以孝, 處族以睦, 能齊家而知道者也, 不其智者之流乎. 他日君之後孫, 能體認此名, 世世樂水, 則樂水二字, 將爲君家之單訣也.”)”라 하였다.
지당실기(智堂實紀)는 박만흥(朴萬興, 1678~1742)의 시문과 행장을 모아 엮은 실기(實紀)로, 목판본 2권 1책으로 출간되었는데, 제1권에는 박만흥의 시문과 편지글 등이 실려 있고 제2권에는 박만흥의 유사(遺事)와 행장(行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말에 부록으로 아들 인당(仁堂) 박세운(朴世雲)과 죽당(竹堂) 박세혁(朴世爀)의 글이 포함된 「연죽당연방실기(仁竹堂聯芳實紀)」도 함께 수록되었으며, 18세기 초반 요수재 건립 이후 19세기 후반에 중건하면서 1870년 7월 여강이씨 이항구(李恒久)와 1873년 밀양의 이름난 효자인 박준구(朴準龜)가 중건기를, 월성최씨 최현필(崔鉉弼, 1860~1937)이 서문을, 청주한씨 한덕련(韓德鍊)과 외손인 문화류씨 류자영(柳自永) 그리고 7세손 박태진(朴泰鎭) 등이 발문을, 묘지명은 박시규(朴時奎)가 짓고, 후손인 박태진(朴泰鎭)·박주호(朴疇鎬)·박태호(朴泰灝) 등이 문집편찬 일을 맡아 1934년 경주 영락재(永樂齋)에서 간행하였다.
『지당실기』권2,「요수재차운시첩(樂水齋次韻詩帖)」은 이조판서 박효정(朴孝正,1796~?)이 서문을 짓고, 지역문사들의 차운시를 실었고, 특히 「요수재중건후차운시첩(樂水齋重建後次韻詩帖)」에는 徐逸勳·李圭升·崔鉉弼·禹昌植·孫黙永·曺世煥·柳永五·權宜重·任弼淳·許埰·文夏錫·鄭宷和·李錫正·金奎鶴·吳錫燾·安璟烈·申翊均·玄在德 등 250여 명의 문사들이 차운시를 남겼는데, 이는 단일의 건축물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당시 지역문인의 교유관계를 파악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선후기 박만흥은 경주지역의 왕성한 교유와 요수재를 중심으로 시화를 이룬 처사문인으로 평가되며, 그 가운데 종오정의 후손인 만송(晩松) 최찬해(崔贊海, 1884~1960)의 ‘요수재’차운시를 보면 박만흥의 인물됨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登斯亭也仰斯名 (등사정야앙사명)
정자에 올라 요수(樂水)의 뜻을 생각하노니
山水靈襟儘不輕 (산수령금진불경)
신령한 산수의 마음 조금도 가볍지 않다네
荒廢有年多士感 (황폐유년다사감)
황폐한지 여러 해 선비로서 애상함 많았건만
重新此日孝孫情 (중신차일효손정)
오늘날에 거듭 중건한 후손의 마음 애틋하네
谷深爰得閒中趣 (곡심원득한중취)
깊은 골짝의 한가로움 가운데 풍취를 얻고
境僻難聞嶺外聲 (경벽난문령외성)
궁벽한 고개너머 세속의 소리 들리지 않네
同閈尊居今幾世 (동한존거금기세)
같은 마을에 살아온 지가 몇세대였던가?
摳衣無路恨吾生 (구의무로한오생)
스승으로 삼을 길 없으니 나의 삶이 한스럽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