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모 방송국에서 방영한 ‘선덕여왕’ 드라마가 인기를 끈 이후 이곳 선덕여왕릉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천왕사지 동편에 승용차 10여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간이 주차장이 생겼다. 주차를 한 후 동해남부선 철로 아래로 난 길을 통과한 후 하강선 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낭산 정상 쪽으로 올라가면 나무데크 길이 나타난다. 여기서 200여 미터 정도 오르면 솔숲 속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는 왕릉을 만날 수 있다. 사적 182호로 지정된 이 능의 형식은 신라 상고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위치가 『삼국유사』「기이」편 ‘선덕왕 지기삼사’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무열왕릉, 문무왕릉, 흥덕왕릉 등과 함께 무덤 주인공이 확실한 것으로 보고 있다. 능 주변의 소나무들은 모두 여왕을 향해 다소곳이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모습 같다. 꿈을 이루기 위한 여왕의 수많은 번민들을 저 소나무들은 알 것 같다. 능은 봉분의 직경이 23.4m, 둘레가 73.3m, 높이 6.8m인 원형봉토분이다. 봉분의 하단에는 둘레돌[호석(護石)]을 돌렸는데, 크고 작은 깬돌을 약 70cm 높이로 2~3단 쌓고 드문드문 둘레돌의 높이와 비슷한 대석을 기대어 놓았다. 이 둘레돌은 원래 흙 속에 묻혀 있었는데 1949년에 보수를 하면서 흙을 걷어내고 다시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릉이 졸렬하게 복원되어, 이후 별도로 둘레돌을 받친 버팀석을 그 사이사이에 끼웠다. 능의 둘레돌은 크기가 불규칙한 깬돌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능 앞에는 최근에 설치한 조선 왕릉의 혼유석 형태를 모방한 상석이 다른 석물들과 함께 놓여 있다. 신라왕릉의 둘레돌은 6세기 초 이전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축조시기에는 자연석이나 깬돌을 이용한 돌담식이었다. 그 이후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이 채용된 초기에는 돌담식의 둘레돌에 버팀석을 두었다. 통일초기에는 장방형으로 치석한 석재를 기단과 갑석을 마련하면서 쌓았고, 그 이후에는 면석(面石)과, 탱석(撑石)을 갖추고 십이지신상을 새긴 둘레돌이 유행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따라서 이 능은 통일 이전 시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고고학적 형식으로 보아도 선덕여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의 둘레돌이 있는 무덤으로는 서악동의 태종무열왕릉과 그 위에 있는 4기의 왕릉급 고분 등이 있다. 능에서 아래로 좀 떨어진 곳에 ‘신라선덕왕릉봉수기념비(新羅善德王陵奉修記念碑)’가 있다. 이 비에는 1949년에 이 능을 수축할 당시 참여한 주민, 후원자, 숭혜전 참봉, 미추왕릉 참봉 등 118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한 때 이 능 앞 배례석에는 거의 매일 새로운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평소 여왕을 흠모한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듯하다. 혹시 이 꽃다발을 지귀(志鬼)가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었을까? 『삼국유사』「의해」편 ‘이혜동진’ 조에 지귀와 관련한 영묘사 화재(火災)에 관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시대에 지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활리역(活里驛) 사람인데, 하루는 서라벌에 나왔다가 지나가는 선덕여왕을 보았다. 여왕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단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어 고민한 나머지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하루는 여왕이 영묘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불렀다. 지귀는 절 탑 밑에서 여왕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여왕이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팔찌를 빼어 놓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팔찌를 발견하고 여왕이 다녀갔음을 알게 되어 사모의 정이 더욱 불타올라 마침내 화귀(火鬼)로 변했다. 이 일 이후 지귀가 화귀로 변하여 온 세상을 떠돌자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이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 뒤 백성들은 화재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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