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문학의 시작은 20세기가 임박한 시기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래서 20세기가 시작되던 시기의 한국문학을 신문학이라 부르기도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한국 신문학의 시작으로부터 광복에 이르기까지 경주에서 태어났거나 경주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거나 2000년까지 경주에서 10년 이상을 생활하다 타계한 작가들 중에서 소설문학에 한정해서 조사한 결과, 다섯 명의 ‘경주 소설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바로 장혁주(1905~?), 김동리(1913~95), 이기현(1913~?), 이종환(1920~76), 성학원(1922~75)의 발견이었다. 김동리와 이기현, 이종환은 경주에서 태어난 작가들이다. 장혁주는 유년시절을 경주에서 생활하며 경주에서 초등학교를 수학했고 성학원은 15년여를 경주에서 생활하다 경주에서 타계한 작가다. 그들 중 김동리 선생은 잘 알려진 위대한 문호라 굳이 소개하지 않았고, 이번호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네 명의 경주 소설가를 중심으로 그들 작가의 초상과 연보, 소설문학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들과 경주와의 연관관계를 연구해 경주의 소설문학 자리를 확보하는 일은 단위문학인 경주의 현대소설문학사를 위한 기초 작업이면서 한국 문학사를 바르게 쓰기 위한 노력이 되었다. 본 기사는 ‘경주의 소설문학(김선학, 장윤익 공저, 경주대학교 경주문화연구소, 2000)’에서 발췌했으며 장윤익 문학평론가의 자문을 얻어 구성했다. 장윤익 문학평론가(전 동리목월문학관 관장)는 김동리와 이기현을, 김선학(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교수가 이종환, 성학원, 장혁주를 조명했다고 한다. -이기현(1913~?), 단편 ‘苔’는 김동리 소설이 미처 확보하지 못한 서술적 치밀성 보여줘 이기현은 1913년 경주시 서부동에서 출생한다. 판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조선인들을 은밀하게 도와준 부친을 둔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1928년 계림초등하교를 졸업한 뒤 서울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고향 경주로 귀향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 김동리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그 시절 김동리, 박목월, 김석주, 김만술(조각가) 등 문우들과의 교류는 그의 작품 창작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단편 ‘苔’ 하나의 작품을 가진 이기현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였다. 이기현은 오히려 작가라기 보다는 문학을 비롯한 여러 장르에 걸쳐 활동한 예술가라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1937년 조선일보에서 발간하던 월간지 ‘조광’ 현상문예에 ‘苔’ 가 당선된 다음 그는 일본 대학을 그만두고 영화사에 취업하면서 영화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1946년 경주예술학교를 설립해 회화, 음악, 조각 등 3과를 두고 학교 운영에 정성을 쏟는다. 해방 직후 절대 빈곤의 어려운 경제 사정에, 일본인이 버리고 간 ‘경주극장’을 운영해 그 수입으로 학교 운영자금과 교·강사의 월급을 겨우 충당하기도 한다. 또 ‘고려교향악단’의 운영에 관계하는 등으로 보아 그는 이상과 꿈이 크고 넓어 문학이란 한 장르에 머물기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단 한편의 작품을 남겼다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보잘것 없다고 하기에는 ‘苔’ 는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천형이라고 알려진 문둥병이 제재인 이 작품에서 이기현은 30년대 어떠한 한국 작가의 작품에서도 보기 어려운 독창성과 휴머니즘, 기법상의 리얼리즘을 구현하고 있다. 그의 유일한 작품 ‘苔’ 를 발굴한 것은 경주 문학의 정립을 위해 매우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동리와도 고향 친구로 자주 어울렸던 이기현은 1930년대 김동리 소설이 미처 확보하지 못한 서술적 치밀성을 보여주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사장되다시피 한 것은 경주의 문학, 나아가 한국문학으로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편의 단편 소설 ‘苔’는 그래서 잃어버렸던 이 작가가 무한한 문학적 잠재력을 가졌던 작가였음을 증언해 주고 있으며 1930년대 한국 소설에 잘 짜여진 소설 작품의 하나로 입적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증표였다. -성학원(1922~1975), 경주의 토양에 문학적 텃밭 가꾸면서 우직하게 작품 써 성학원은 1922년 평북 출생으로 1948년 월남해 경북영주농업학교 교사로 재직한다. 34살이 되던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인간고발’로 입선한 것은 당시로는 문학적 출발이 늦은 편이었다. 그 뒤 195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인맥’으로 당선돼 문단에 등장했다. 30대 후반에 문단에 작가로서 등단했다는 것은 늦은 출발임에는 틀림없고, 그동안 그가 문학에 대한 열정과 소설에 대한 끊임없는 습작의 수련이 있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게 된다. 그는 경북의 여러 지역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경주에서도 경주공고와 경주여고 등에 발령받아 경주에서 생활한다. 40세 되던 1962년, 문인협회 경주지부장에 피임되고 제2회 신라문화제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은 것을 보면 경주에서의 생활은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그 시작으로 보인다. 1970년까지 10여 년 경주문협의 지부장을 맡은 것을 보면, 경주와 문학, 그리고 그 문학적 토양에 분명 그의 정서적 텃밭을 가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연보를 보면, 절반 이상의 작품이 경주에서 생활했던 때 쓰여지고 있음은 이런 것들을 뒷받침한다. 그는 문단에 등단해 작가 생활을 한 20년 동안 20여 편을 남겼다. 경주의 토양에 문학적 텃밭을 가꿔놓으면서 우직하게 작품을 썼던 것이다. 주요작품으로는 ‘불연속선(59)’, ‘인간비밀(59)’, ‘길(60)’, ‘잃어버린 사람들(61)’, ‘인간설화(65)’ 등이 있다. 작풍은 휴머니즘의 바탕 위에 초현실적 의식의 흐름을 추구했다. -이종환(1920~76), 문단에서 목월과 가장 가깝게 지낸 사이로 실존적 인생을 조감 이종환<인물사진>은 1920년 당시 월성군 건천면에서 출생한다. 10대 후반까지 경주에서 성장했다. 역시 건천 출생의 목월과의 인연으로 문단에서 목월과 가장 가깝게 지낸 사이였음을 이곳 출신 문인 이근식 선생이 증언한 바 있다. 이종환은 만주 등지에서 지내기도 하는데, 만주에서 시와 소설 10여 편을 발표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53년 ‘발’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는 또 ‘자유공론’ ‘여원’ 등의 잡지의 편집장을 역임한다. 그는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자주 경주를 내왕했으며 그의 경주행에는 대부분의 경우 박목월과 동행이었음을 경주의 많은 후배들은 기억해 증언하고 있다. 이종환의 작품세계는 정신적 승리를 제기하는 이상주의적 종교 의식과 실존적 인생을 조감하는 인간의 비리와 이에 대응하는 휴머니즘, 이를 애정으로 펼쳐 보이는 사랑의 양면성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종환과 성학원의 소설 문학은 커다란 성취를 이룬 것이라고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그들이 충실한 이야기꾼으로써 자신들의 문학 세계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학원은 15년여를 경주에서 생활하면서 그의 작품 대부분을 경주에서 집필한다. 이종환의 소설 속에는 경주가 희미하게 배경으로 깔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학원의 대부분 소설들은 그 공간적 배경을, 두고 온 이북의 고향과 경주지방으로 설정하고 있다. 경주를 떠나 살았던 경주 출신 작가와 경주로 이주해 자신의 문학적 지도를 그려갔던 작가, 이 둘 중 어느 쪽의 작가가 그들 작품에 더 많이 경주를 등장시키는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주와 관계하는 작가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들 문학의 세계에 경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장혁주(1905~?), 일제 강점기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으로서 문학 형성되는 과정서 경주가 정서적으로 매우 크게 자리해 장혁주는 1905년 대구 출신으로 경주로 생모와 함께 이사해 정착하게 된 것은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이다. 장혁주가 유년과 소년시절 대부분을 경주에서 생활한 것은 이후 그의 문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경주의 비중이 정서적으로 매우 크게 자리했음을 알게 해준다. 1931년 소설 ‘아귀도(餓鬼道)’를 발표해 일본 문단에 등단했다. 그의 작가 생활은 이때부터 본격화 된다. 그러나 그는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작품을 쓴 멍에를 문학의 전 생애에 업보처럼 걸머지게 된다. 장혁주는 1932년 ‘아귀도’ 이후 해방될때까지 장편 16편을 포함한 소설 60여 편을 주로 일본어로 썼다. 해방 이후 그가 일본어로 귀화해 일본어로 쓴 작품까지를 포함한다면 대단한 분량의 소설을 쓴 작가다. 이는 그가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가운데 한 명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의 문단활동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등단 초기부터 조선에서는 ‘친일작가’로, 일본에서는 ‘반도작가’로 불리며 그의 문학은 차별 당했고 점차 문학적 동력도 잃어갔다. 그를 일본작가로 볼 것인가, 한국작가로 볼 것인가는 논구돼야 할 것이지만 경주에서 정서적 토양을 키웠던 이 한국 출신의 작가가 쓴 한국어 작품만은 한국 문학의 범주 속에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장혁주는 그의 작품을 대부분 일본어로 썼다. 많은 작품 중에서 한국어로 쓴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쫓기는 사람들’ ‘권이라는 사나이’ 등 장혁주의 주요작은 모두 일본어로 창작되었고 ‘삼곡선’은 장혁주의 한국어 소설 중에서 상대적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일본어로 쓴 그의 출세작 ‘아귀도’는 한국문학에 소개돼 본격적으로 다룬 적이 없었다. 그 아귀도를 처음으로 한국어로 옮기고(경주 수필가 오경환이 처음 옮김)일본어 원문과 함께 소개한 것은 한국문학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 불우한 작가를 당당히 경주문학, 나아가서 한국문학사에 입적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