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사원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그 실체가 불분명했던 황복사(皇福寺) 터에서 웅장하고 화려했던 면모를 보여주는 유적 1000여 점이 출토됐다.
경주시가 (재)성림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지난해 8월부터 발굴조사 중인 경주낭산 일원 4670㎡ 부지에서 기다란 돌로 기단을 조성한 대형 건물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등 다양한 건물지와 지붕이 있는 긴 복도 인 회랑지, 유물 등이 무더기로 나왔다.
황복사(皇福寺)는 삼국유사에 654년(진덕여왕 8년)에 의상대사(625~702)가 29세에 출가했다고 기록된 절이다.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황복사탑 사리함에서 ‘죽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신성한 영령을 위해 세운 선원가람’을 뜻하는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글자가 나와 왕실사원으로 추정됐다. 당시 삼층석탑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도 확인돼 주목 받았다.
이번 2차 발굴조사는 전 황복사지 삼층석탑 동쪽 약 30m 떨어진 경작지 4670㎡를 대상으로 2017년 8월부터 진행했다. 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터, 담장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구가 대규모로 발견됐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왕실사원의 위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지는 대석단 기단 건물지. 서쪽의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에 덧붙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남쪽 면에는 돌을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북쪽 면에는 자연석을 쌓아 약 60m에 이르는 대석단을 구축한 후 전면 중앙부 북쪽에 돌계단을 설치했다.
연구원 관계자는 “대석단 기단 건물지는 내부를 회랑을 돌린 독특한 구조로 이는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은 가람배치 방식”이라며 “이러한 특징을 통해 특수한 용도의 건물이거나 전 황복사지의 중심 건물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에는 십이지신상 묘(卯, 토끼), 사(巳, 뱀), 오(午, 말), 미(未, 양) 등 4구가 조각된 석재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어, 대석단 건물지와 함께 전 황복사지의 중요 전각지로 보고 있다. 십이지신상은 신라 왕릉에서 확인된 십이지신상 탱석과 비교했을 때 더 발달한 형태를 보이며 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과 더불어 조각미가 뛰어나다. 면석과 봉토가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돌인 탱석(撑石)의 도상은 김유신묘와 헌덕왕(809~826) 능의 십이지신상보다 앞서며, 제작 연대는 8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축조 당시 십이지신상 탱석은 다른 왕릉에서 옮겨와 건물지의 기단석으로 다시 사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출토된 1000여 점 이상의 유물은 대부분 토기와 기와다. 연구원 측은 이들 유물이 7∼9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식이 화려한 신장상 화상석, 치미, 기와 등을 통해 당시 격조 높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 등 7점의 불상 유물은 전 황복사지가 7~10세기까지 신라 왕실사원으로 유지됐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또 낭산의 동쪽에 해당하는 지금의 보문동 지역도 통일신라시대의 도시계획의 하나인 방리제(坊里制,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를 설계)에 의한 계획도시임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경주시 관계자는 “이번 조사는 통일신라시대 왕실사원과 신라왕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며 “앞으로도 황복사의 실체를 규명하고 유적을 정비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1차 발굴조사는 지난 2016년 6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구황동 100번지 일대 과수원과 경작지 4628㎡를 대상으로 진행했었다. 그 결과 효성왕(재위 737~742)을 위한 미완성 왕릉과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도로 등을 확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