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재학시절 교생실습을 할 때였다. 그 학교 교장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있었으니, 교사로서의 안목을 제대로 갖추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교사는 무안지사(無眼之師), 구안지사(具眼之師), 달안지사(達眼之師)의 세 부류가 있는데 제대로 자질을 갖춘 달안지사가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를 하셨다.
무안지사란 눈이 있으되 제대로 보지 못하는 교사, 구안지사란 겨우 눈에 보이는 업무만 처리하는 수동적인 교사, 달안지사란 학생지도와 교무업무에 통달한 사람을 이른다는 것이었다.
『금강경』에 부처님과 수보리와의 대화에 의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다섯 가지의 눈이 있는데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 그것이다. 육안은 가시적인 현상만을 볼 수 있는 범부의 눈을 이르는 것이다.
천안은 인연·인과의 원리에 의한 현상의 차별적인 것만을 볼 뿐, 그 실상은 보지 못하는 눈을 말한다. 혜안은 모든 집착과 차별을 떠나 진리를 밝히는 눈이다. 법안은 현상의 모든 사물과 이치를 아는 지혜로, 모든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눈이다.
불안은 부처가 갖고 있는 눈으로 앞의 네 가지를 다 갖추고 있어 보지 못하는 것이 없고, 알지 못하는 일이 없고, 듣지 못하는 일이 없다.
선덕여왕은 미래를 통찰하는 눈 즉 달안(達眼)을 너머 불안(佛眼)을 갖춘 왕이었다. 그 증거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즉, 「기이」편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조에 여왕의 총명과 신통을 기린 세 가지 신기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첫째는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로,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의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함께 보내 왔다. 왕은 그 꽃 그림을 보고 꽃에 향기가 없음을 예언하였는데, 이듬해 핀 그 모란은 과연 향기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둘째는 몰래 침략한 적군을 미리 알아 섬멸한 이야기로, 영묘사 옥문지에는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울었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니 왕은 정병을 여근곡에 보내었다. 군사가 서쪽 교외에 가니 과연 여근곡이 있고 적군 5백여 명이 매복하고 있으므로 이를 섬멸하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왕이 자신의 죽을 날을 미리 안 이야기로, 생전에 자신이 죽을 날을 예언하며 도리천(忉利天)에 장사 지내 달라고 일렀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가를 물으니 낭산(狼山) 남쪽이라고만 답하였다. 왕이 과연 예언한 날에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10년 뒤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무덤 아래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 하였으니 그제야 예언이 적중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신하들이 이 세 가지 지혜의 해답을 물어보았는데 왕이 대답하기를, 모란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을 것임을 알았고, 개구리의 불거진 눈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상징으로 음(陰)이며, 그 빛이 희고 또 흰 것은 서쪽을 가리키므로 적군이 서방에 매복하고 있음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 ‘향기 없는 모란꽃’ 이야기의 경우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이 공주이었을 때의 일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설화는 선덕여왕이 불경이나 주역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려 주는 이야기로, 일연스님은 삼색 모란은 신라에 선덕·진덕·진성의 세 여왕이 있을 것임을 당 황제가 미리 헤아려 맞춘 것이라며, 당 황제의 지혜와 선덕여왕의 지혜를 함께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으로 왕이 된 이후 선덕여왕의 앞길이 평탄하지만 않았다. 왕이 된 지 7년에는 고구려로부터 칠중성을 공격당하였으며, 11년에는 백제로부터는 당항성을 침범 당하고 이어 대야성을 빼앗기자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당 태종으로부터 “여왕이 재위하고 있으므로 이웃나라가 깔보니, 내 종친 한 사람을 보내 국왕을 삼고 군사를 파견하겠다”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재위 마지막 해에는 비담과 염종이 명활성을 그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