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25) 4월 14일에 왜놈들이 병선 700여 척을 타고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된다. 가까운 경주 역시 위험에 처하였고, 이를 계기로 6월 9일 영남의 의병들은 경주를 중심으로 월성에 모여 문천회맹(蚊川會盟)을 맺고 경주읍성 탈환에 박차를 가한다.
임란 당시 경주부윤 윤인함(재임1589.12~1593.7)이 의병들과 모의하였으나, 자신을 아끼지 않고 큰 활약을 이끈 판관 박의장(재임1593.7~1599.5)에게 부윤의 자리가 돌아갔고, 박의장은 의병을 이끌고 대구·안강·울산전투 등에서 적을 무찔렀다. 당시 경주 의병활동의 지도자 가운데 정무공(貞武公)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1568~1636)장군과 백암(栢巖) 김응택(金應澤,1551~1597)장군 등 대략 340여 명은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웠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1597년 정유재란 때 김응택은 울산의 서생포(西生浦)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최진립은 권율을 도와 공을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해 경기도 용인 험천에서 싸우다가 순절했다. 이들 김응택과 최진립 등의 창의(倡義: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킴)는 칭송받아 마땅할 점이나 또한 주인을 따라 전쟁터에 나선 충노(忠奴)의 얘기 역시 귀감이 된다.
내남 이조의 정무공은 1592년 부산의 동래읍성을 통해 경주까지 들이닥친 상황에 6월을 시작으로 9월 경주읍성을 탈환하며 큰 공을 세운다. 이때 옥동(玉洞)은 주인과 함께 참전해 힘써 싸우다 전사하였고, 훗날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기별(奇別)은 주인을 위해 힘써 싸우다 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주인과 함께 전사한다. 이러한 충노의 행실에 감복해서 정무공 집안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정무공의 기일에 충노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으며, 최진립장군의 충노 옥동과 기별 얘기가 미담으로 전해온다.
김응택은 족숙 구재(懼齋) 김득추(金得秋,1562~1660)와 외재(畏齋) 김자평(金自平) 등과 의병을 일으켜 영천·경주·울산 등을 넘나들며 적을 무찔러 공훈을 세웠으며, 그에게는 충직하고 힘이 장사인 천죽(千竹)이라는 종이 있었다. 그는 참봉 김순번(金順蕃)의 아들로 옛 경주 북안 장동리(章洞里.현 영천시 임고면 금대리)에서 태어났으며, 4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을장정들과 노비 천죽과 함께 왜놈을 추격해서 활과 창을 빼앗고, 백암산(栢巖山) 협곡에 매복해 있다가 적들을 잡아 죽여 의병의 사기를 높였다. 훗날 조정에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에 이어 훈련원정(訓練院正)을 제수하였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 12월 21일 울산 서생포에서 권응수 장군의 육촌 아우인 권응심(權應心)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묘소는 영천시 임고면 사리 매남산(梅南山)에 있으며, 임고면 사리의 백암사(栢巖祠)에서 배향되었다. 당대의 문인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1732~1809)·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1777~1861)·역암(櫟庵) 류치유(柳致游,1811~1871)등의 묘갈명과 전(傳)·소(疎)를 통해 그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왜놈 수십 명이 밤에 횃불을 들고 떼 지어 지나가는데, 공은 마을사람 10여 명과 몰래 산을 넘어 길옆에 매복하였다. 적이 이르자 갑자기 그들의 뒤를 쳐서 적의 목을 모두 베었다. … 공의 무예와 용맹이 무리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천죽 역시 장사였다. … 경주 금장대 전투에서 적의 목 3급를 베었고, 쏘아 죽인 적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靑城 成大中의 『靑城集』卷9,「慶州金義士墓誌銘」,“倭數十, 夜爇炬羣過, 公與里人十餘, 潛踰山夾路伏. 賊至, 急擊其背, 盡馘之. … 公武勇冠衆, 千竹亦壯士也. … 戰慶州金藏臺, 斬三級, 射殺賊無數.”)
천죽이 탄환을 맞고 고꾸라졌다. 김응택은 그를 짊어지고 구미산에 올라 낙엽으로 덮어주었는데, 잠시 낙엽에서 소리가 나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약하게나마 호흡이 있었다. 마침내 입을 갖다 대고 침을 흘려보내니 과연 되살아났으나, 탄환 아홉발이 왼쪽 넓적다리에 맞았다. 또 70리 밤길을 짊어지고 집에다 내려두고는 전장으로 떠났는데, 이때부터 천죽은 넓적다리에 병이 생겨 전장에 나갈 수가 없었다.(癡庵 南景羲(1748~1812)의 『癡庵集』卷9,「訓鍊正金公應澤傳」,“千竹中丸而仆, 應澤負上龜尾山, 覆以落葉, 頃之葉鳴, 熟視之微有息. 遂交口垂涎果甦, 而九中左股矣. 又負夜行七十里, 置之家而去. 自是千竹病股, 不能赴戰.”)
정유년(1597) 12월 21일 마침내 적들이 울산 서생포를 쳐들어와 종일 힘써 싸웠다. 충의공 권응수의 사촌동생 권응심과 같은 날 전사하였다. 아내 이씨는 아들 김경룡과 남편의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3일 밤 동안 내내 통곡하였다.(定齋 柳致明의 『定齋集』卷28,「訓鍊院正金公墓碣銘 幷序」,“丁酉十二月二十一日, 逐賊於蔚之西生浦, 竟日力戰. 與忠毅公從弟應心, 同時立殣. 妻李與孤景龍, 尋屍不得, 三日夜哭不絶.”)
고을수령은 김경룡을 불러 “어찌할꼬? 초혼을 하여야 장사를 지낼 것인데”하고는 초혼의 글을 지어 주었다. 이듬해(1598) 천죽과 마을의 여러 사람을 데리고 모두 가서 혼을 불러 작점의 들판에 장사지냈다.(訂窩 金岱鎭의 『訂窩集』卷15,「訓鍊正栢巖金公墓誌銘 幷序○乙丑」,“主倅爲招景龍諭曰, 可柰之何, 其招魂而葬乎. 爲作招魂詞以付之. 越己亥正月, 率千竹及鄕里諸人, 齊往而招魂, 歸葬于鵲店艮坤之原.”)
이처럼 경주출신의 의병장 김응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노 천죽과 함께 목숨 바쳐 고장을 수호하였다. 이때 천죽은 주인과 함께 싸우다 넓적다리에 무수한 탄환을 맞아 거의 죽을 뻔한 것을 김응택이 살렸으나, 결국 평생 다리가 불편한 몸이 되었다. 이후로 주인과 함께 전장을 누비지 못한 천죽은 집안일을 돌보며 주인의 앞날을 걱정하였는데, 정유재란이 일어나 울산의 서생포에서 주인의 전사소식을 전해 듣고는 시신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흔적조차 없고, 거의 1년간 시신을 찾지 못해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자, 천죽과 마을의 모든 사람이 서생포로 달려가 그의 혼을 불러 겨우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이때가 왜놈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은 해이기도 하니, 그의 충절은 죽어서도 계속 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즉 선비란 견위수명(見危授命:나라가 위태로울 때 서슴없이 목숨을 바침)하여야하니, 그는 죽어서도 왜놈의 잘못을 꾸짖고 조선의 안위를 살핀 경우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