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孔子謂季氏 八佾 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공자 위계시하시되 팔일로 무어정하니 시 가인야이면 숙불가인야리오?
<주석>
季氏 :魯나라 大夫 季孫氏
八佾 :天子의 舞樂이다. 여덟 사람이 한 列이 되어 8列이니 모두 64명이다. 제후는 6열로써 48명이고, 대부는 4열로써 32명이며 士는 2열로써 16명이다. 계손씨는 대부인데 종묘의 뜰에서 八佾의 춤을 추게 하였으니 이는 대부로서 천자의 예절을 참람히 행한 것이다.
佾 :춤의 줄이다. 忍 :容忍이다.
<번역>
공자께서 계손씨를 평론하셨다. “계씨가 천자의 팔일무를 추게 하였으니 이 참람한 일을 용인한다면 무슨 일인들 용인하지 못하랴?”
<묵상>
민주사회는 평등사회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그러나 봉건 사회는 분명 상하 계급의 신분이 있었다. 그 계급, 그 신분에 맞게 처신하여야 한다. 이를 어기고 더 높은 계급의 일을 하는 것이 참람함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평민은 100칸 집을 짓지 못하며 상민은 갓을 쓰지 못하였다. 이는 그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律이요, 법이었다. 이를 지키므로 그 사회는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계손씨는 제후도 아닌 대부에 불과한데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예절을 감행하였으니 그 참람함이 극에 달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다스리지 못하는 그 사회를 한탄하시는 것이다.
민주사회가 된 대한민국에서도 한때 ‘각하’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아마 자유당 때는 군대의 사단장 정도만 되어도 각하란 호칭을 쓴 것 같다. 그러다 박정희 시대에 와서는 대통령에게만 쓰다 나중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인가 없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위의 공자님의 말씀을 낡은 봉건 시대의 유물로만 치부하여 버리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에도 일면의 진리를 지니는 값진 금언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분수가 있다. 또 그 직위에 따른 예의가 있다. 그러므로 그 분수에 맞게 처신하여야 한다. 물론 오늘의 사회에서 인격에 따른 상하는 없다. 그러나 그 직위나 직무에 따른 상하는 있는 것이다. 이를 지켜야지 이를 무시하고선 사회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은 것이다.
2. 三家者 以雍徹 子曰 相維辟公天子穆穆 奚取於三家之堂?
삼가자 이옹철이러니 자왈 상유벽공 천자목목을 해취어삼가지당인고?
<주석>
三家 :노나라 대부 孟孫, 叔孫, 季孫을 가리킨다.
雍徹 :천자가 종묘의 제사에서 祭品을 거둘 때 雍의 詩를 노래하여 신을 즐겁게 한다.
雍 :周 나라 頌의 篇名이다.
徹 :제사를 마치고 제품을 거두는 것이다.
相維辟公天子穆穆 :雍詩의 歌詞이다. 相은 助, 도움이다. 辟公은 제후, 穆穆은 멀고 깊은 모양이다.
<번역>
노나라 대부 맹손, 숙손, 계손 세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제품을 치울 때에 雍詩를 노래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옹시에서 말하기를 제후들의 ‘도움이여, 천자는 장엄하고 엄숙하도다’ 하였는데 이를 어찌 삼가자의 묘당에서 취하는고?
<묵상>
이 역시 참람함의 극치이다. 대부의 신분으로 감히 천자의 예를 행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말하였거니와 여기서는 다른 면에서 묵상해 보자. 위의 삼가자는 노나라의 대부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그럼에도 거침없이 이를 꾸짖는 공자의 모습에서 지성인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지성인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이렇게 바른 소리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를 木鐸의 구실이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