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석조 유물들이 공공기관(관공서)이나, 학교, 민가 등에 옮겨지거나 유입돼 관리가 잘 되고 있거나 혹은 방치돼있는 경우가 있다. 더러는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어 도난의 위험도 안고 있다.
경주세무소 석조, 계림초등학교, 선덕여고 석탑재, 경주고등학교 무인상과 석탑재, 법원, 시청, 경주경찰서 맞은편 삼락회관의 석탑재 부재들, 구 오릉초등학교, 동경관, 교동 최부잣집 석등과 석조, 석탑재들, 안강문화회관 석불좌상(파손심함) 등 경주시내에 열 개가 넘는 관공서나 학교에 이들 석조물들이 산재해 있다. 이외에도 읍성 주변의 동부동, 서부동, 북부동과 남간 마을에도 다량의 석조유물들이 민가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 곁에 가까이 있지만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아야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이름없는 석조물들이 경주시내와 외곽에 많은 것이다. 한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렸던 지난달 31일, 김환대(경주문화유적답사회 회장, 경주문화연구원장)원장의 자문과 함께 경주에 흩어져있는 고대 신라서부터 근대까지를 관통하고 있는 증거물로써의 석조물들을 찾아보았다.
오랜 세월을 버텨 온 석조물들에서는 당시 석공들의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비록 알려져 있지 않아 이름도 없고 간단한 이력도 없는 유물들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천연덕스러운 석조물들은 잠시 일상의 번잡함을 잊게 했다.
-“알려진 유적들에 비해서는 소박하기 이를데없지만 지금이라도 관심 가지고 관리해야”
제일 먼저 성동동에 있는 경주세무서를 들러, 입구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조를 볼 수 있었다. 이 석조는 돌로 만든 물통으로 세무서가 생겼을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옮겨간 비석이나 석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러 곳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입구 쪽에 있으나 벽 뒤쪽에 위치해있어 거의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았다. 동부동 경주문화원 산수유 앞에는 석등과 탑재들, 장대석, 기단석 등이 단정하게 위치해 있었다. 동부동에 있는 고려시대 객사인 동경관에는 탑재와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는 통돌 계단이 한쪽에 있었다.
김 원장은 “동경관 주변, 경주 읍성 주변 여러 민가들에도 다수의 석재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동부동, 서부동, 북부동 일대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많습니다”라고 했다. 또, “이런 유적들은 찾아가는 재미도 있지만 지금 관리하지 않으면 잊혀진 유적이 될 것입니다. 알려진 유적들에 비해서는 소박하기 이를데없지만 지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관리하지 않는다면 옮겨지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유적들도 있습니다”고 우려했다.
법원 앞에는 주춧돌이 있었으며 동부동 경주경찰서 앞뜰에는 석탑과 석탑재들이 있었으나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앞으로 옮겨졌다. 지난해, 박물관 측과 협약을 맺어 보존상의 이유로 옮겨졌다고 한다. 경주경찰서 석탑은 현곡면 남사리 절터에 있던 것이라고 전해왔으나, 일제강점기 때 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처가 새겨진 석탑 몸돌과 탑재로는 바닥돌과 1층 몸돌, 3개의 지붕돌이 있었다. 1973년 경주경찰서 신청사를 준공할 때 기단부만 남겨두고 지붕돌 3개를 경찰서 정원으로 옮겨 보존해 오다가, 지역 주민들의 건의에 따라 1995년 부족한 탑재를 보충해 복원해 놓았었다고 한다.
-구 오릉초등학교 고려시대 석탑재, 관리 되지 않고 방치된 대표적인 사례
북부동 계림초등학교에는 고려시대 석탑으로 보이는 지붕돌과 몸돌 등이 화단에 있었으며 짜깁기해 놓은 탑임을 알 수 있었다. 사정동에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는 흥륜사터로 알려져 있다. 절터여서인지 석조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었다. 석조물, 장대석 등 건축 부재들이 많았다.
탑동에 있는 경주인성교육체험장(구 오릉초등학교)를 찾아가는 도중에 있는 탑동 취수장에는 탑 옥개석 등이 있었으나 도난을 당해 지금은 답사 자체가 민감한 상황이라고 했다. 경주인성교육체험장 내 옛 정문 옆 경비실 뒤편에는 고려시대 석탑재로 추정되는 석탑 지붕돌이 있었다. 문제는 이곳 주변이 틔여 있어 도난에의 위험이 상당히 큰 편이라는 것이다.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된 대표적 경우였다. 김 원장은 “이 석탑 지붕돌은 비교적 완벽한 상태여서 박물관으로 옮겨 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지붕돌 층급 받침이 4단이므로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며, 몸돌과 지붕돌이 한 몸으로 돼 있는 경우로써 특이한 편입니다. 부재는 작지만 석탑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경주에서 보기 드문 석탑의 형태입니다” 라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황오동에 있는 경주고등학교에는 헌덕왕릉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무인상 상반신상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마멸은 심했으나 윗부분은 잘 남아있는 편이었다. 이 무인상은 북천 홍수속에 떠내려 온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또,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은 어느 정도는 완전했으나 일부는 조립이 돼 있었다. 이 밖에도 주춧돌과 비석 머리부가 있었다. 수봉 선생 동상 앞에는 문무석인상이 좌우로 있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대부 묘를 지키던 석상들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인왕동에 있는 선덕여자고등학교에는 석탑 3기와 월정교 부재들이 있었다. 석탑 1기와 월정교 부재는 교문의 오른쪽에 있었다. 월정교 부재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것을 1950년 3월, 이곳으로 옮기면서 다릿돌만으로 축조해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이 외 석탑 2기는 다른 부재들과 함께 본관 앞 화단에 있었다. 이들 학교 중 가장 많은 석조 부재가 있는 곳은 경주공업고등학교다. 다음으로 경주고등학교, 선덕여자고등학교, 계림초등학교 순이라고 한다.
-교동 ‘석등이 있는 집’, 경주에서 유일하게 지정 문화재가 민가에 보존돼 있어
동천동 경주교육지원청에는 석탑과 석등, 각종 석조물이 잘 정리돼 있었다. 경주시청에는 비석 머리 세 개, 이수 하나, 석등 덮개돌 등이 시청민원실 앞쪽 화단에 있었다. 이들 석조물들은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었다. 머릿돌들은 경주 향교에 있는 공덕비 등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17세기 머릿돌로 추정되고 있다. 김 원장은 “특히 시청에는 많은 시민들이 찾으므로 이들 석조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더욱 필요해 보입니다. 있는 현 상태 그대로라도 설명을 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고 했다.
한편, 동천동 한국전력공사와 보문단지내 경북관광공사 앞뜰에는 복원된 석등들이 있는데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이 된 안내판을 배치해 놓고 있다고 해 대조가 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주에서 유일하게 지정 문화재가 민가에 있는 경주 교동의 ‘석등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석등의 하단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라 한다. 이 아름다운 석등(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0호)이 200년 된 전통 한옥의 정원에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석등 모양이 아니어서 절터에서 가져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변에는 석조물들과 비로자나불이 있는 석탑재도 있었다. 또 다른 석등과 감포에서 싣고 왔다는 기암괴석도 함께였다. 특히, 첨성대 돌 중 하나라고 알려진 디딤돌은 아연실색케 했다. 그리고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아예 붙여 놓았다는 기왓장(암막새와 수막새)도 박물관에서나 봄직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석조물 유입된 경위나 시대 등을 조사해 밝히고 간단하게나마 설명하고 안내해야”
김 원장은 “경주시나 국가에서 이들 석조물을 수거할 명분은 없습니다. 석조물들을 수 십년 보관할 경우에는 사유화 되기 때문이지요. 이들 석조물들을 일괄적으로 수거히는 것도 행정 절차 등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70년대 내고장 전통가꾸기 운동의 일환으로 관공서가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해 이들 석조유산들이 많이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압니다. 박물관으로 옮겨가는 것이 상책이긴 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하므로 공원을 조성해 통합된 자리로 옮기든지, 그렇지 않으면 현황이라도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유적들을 찾아 타지에서 오는 매니아들 보다도 경주시 자료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입니다”라면서 “다른 지자체는 간단한 설명은 하고 있으나 아직 경주는 그런 설명이나 석조물들의 유입 경위나 조성 시대 등에 대한 안내가 전혀 없는 편입니다. 유입된 경위나 출처 등을 조사해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간단하게나마 안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작업이 절실합니다” 라고 강조했다.
이런 석조물들을 찾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한다면 이색적인 경주의 또다른 단면을 볼 수 있는 시간으로 손색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