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흑백만을 구별할 것이라는 우리 예상과 달리 개는 더 다양한 색깔로 세상을 인식한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고양이는 세상을 인간보다 6배나 더 선명하게 본다.
그럼 파리는 어떨까? 세상을 슬로우 모션(slow motion)으로 느낀다고 한다. 사람 주변을 뱅뱅 돌며 자꾸 귀찮게 하는 파리를 한번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아무리 손을 변칙적으로 휘저어도 녀석을 잡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에게 휘두르는 인간의 손이 너무 느려서 차마 잡히고 싶어도 못 잡힌다는 거다.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교수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곤충은 인간보다 세상을 더 느리게 인지하기 때문이란다.
워밍업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 본 게임이다. 자, 컴퓨터는 그럼 세상을 어떻게 인식할까? 생명이 없는 고철덩어리 컴퓨터가 스스로 세상을 보지는 못할 테니, 컴퓨터 전문가들은 어떻게 컴퓨터가 세상을, 가령 인간으로부터 원숭이를 구별할 수 있게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분류’를 통해 세상을 이해시킨다고 한다. 간단하게 O·X로 생각하면 쉽다. 뭔가가 컴퓨터 앞에 놓였다고 치자. 먼저 먹을 수 있는 건지 못 먹는 건지를 분류한다. O가 나왔으니 앞에 놓인 건 먹을 수 있는 거다. 그럼 뜨거운지 아닌지를 O·X로 분류해 보았더니 뜨거운 거란다. 이런 식으로 컴퓨터가 라면을, 부대찌게를 이해한다고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뭔가 좀 허전할 때, 스산한 날씨에 비마저 부슬부슬 내릴 때 문득 생각나는 라면을, 컴퓨터는 O·X로 인식한다니 참 컴퓨터답다.
이처럼 분류를 통해 일단 ‘라면’을 이해시켜 놓으면 그 다음부터는 라면 이미지를 보는 순간 ‘이것은 라면’하고 순식간에 분별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걸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이라고 한다는데, 이런 거 우린 몰라도 된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컴퓨터가 ‘거무죽죽하다’라는 말과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우리말을 모른다는 거다. 분류를 할 수 없으니 그렇다. ‘거무죽죽’도 모르니 ‘거무티티’도 당연히 모른다. ‘누렇다’를 모르니 ‘누리끼리’라는 개념은 그저 ‘아리까리’할 뿐이다.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으로 라면과 모래는 쉬이 구별할 수 있지만, 인간의 정서 그 정점에 있는 ‘미운 정(情)’은 인공지능이 와닿기 힘들다. 미움 그리고 사랑이나 친근의 정은 사실 형용모순(形容矛盾)이기 때문이다. 좋고 싫고를 초월한 인간의 감정(感情)이란 말이다.
너 없으면 죽을 듯 그렇게 사랑하다가도 사람이란 참 알 수 없다. 서로 헤어지게 되는 수도 있다. 이때 서양인의 경우 우연히 다시 만나도 스스럼없이 “hello”, “how are you?” 하고 안부를 묻는다. 연인과 친구의 선이 분명하다. 연인이 아니라 이젠 친구니까 그게 가능하다(개인적인 경험에 근거를 한 주장이라 일반화 오류가 아닐지 걱정스럽다).
하지만 한국인의 헤어짐은 다르다. 전(前) 남자친구가 저 멀리 지나가도 여기 내 가슴은 벌써 콩닥거린다(이 역시 너무 과장 아니냐 해도 할 말은 없다). 뿐만 아니다. 같은 장소에 만나는 것도 꺼린다. 비록 그것이 우연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사내 커플이나 캠퍼스 커플이 쉬쉬해가며 비밀 연애를 이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여나 헤어진다 하더라도 당사자만 알거니까….
모순덩어리인 ‘미운 정’도 만들 수 있는 우리 민족은 좋고 싫고의 이분법(二分法)도 다르게 인식한다. 한국 정서에 있어 고운 정은 어쩌면 상대의 어느 한 부분만을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운 정이 들어야 비로소 상대를 온전히 품을 수 있는 모양이다.
컴퓨터마냥 세상 모든 것들을 O나 X로, 즉 ‘Yes’나 ‘No’로만 파악한다면 ‘조인성’을 ‘조인성’으로 파악할 수는 있겠지만, 못 생긴 내 남자친구를 조인성 보듯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후자처럼 인식해야 할 당위성은 없다. 하지만 전자로만 세상을 산다면, 즉 컴퓨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평강공주는 바보온달을 그저 바보로만 바라볼 뿐이다. 컴퓨터가 인공지능이란 이름으로 인간을 모방하는 중이라면 언젠가는 거무죽죽한 색을 잘 쓰는 컴퓨터가 개발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