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틀라스가 아니고 여자이다. 때에 따라서 여자는 지구를 공처럼 가지고 논다”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츠가 쓴 소설 ‘쿼바디스’에서 페트로니우스가 비니키우스에게 한 말이다.
일찍이 신라를 공처럼 가지고 논 여인들이 있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의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의 휘(諱)는 백정(白淨)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정반왕(淨飯王)으로부터 따온 것이고, 마야부인은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과 같다. 그러니 선덕여왕 자신이 바로 석가모니인 셈이다. 선덕여왕의 삼촌은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삼촌과 같은 이름이다.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법흥왕 이후 신라에서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 강화를 위해 ‘진종설’ 의식에 사로잡힌다. 진종설이란 ‘진짜 석가모니 집안’을 의미한다. 왕의 이름도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덕왕 등 ‘진(眞)’이라는 글자를 넣어 진짜 석가모니 가족과 같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을 시호라고 했지만, 『신당서』 및 『구당서』에는 생존 시의 왕호(王號)라고 했다. 『대방등무상경』에 의하면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에 의해 전륜성왕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은 덕만공주였다. 『열반경』에 ‘덕만우바이’가 있는데 이 경에 의하면 그는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부러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다고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딸인 그녀를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바쳤다고 하였다. 하지만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성골(聖骨) 남자가 다하여 여왕을 세웠다[聖骨男盡故女王立]”고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의 동생들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도 이미 죽었고, 진평왕의 가계(家系)에 남자 혈족이 존재하지 않아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장녀 천명이 아닌 차녀 덕만(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선덕이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있어 진평왕이 천명에게 양보할 것을 권하자 천명이 이에 따랐다고 한다. 왕위에 오를 당시 선덕여왕의 남편은 김용춘이었으나 자식을 잉태하지 못하자 용춘의 형인 용수가 선덕여왕을 모시게 되었다. 자식이 없을 때 세 명의 남편을 두는 삼서의 제도[三婿之制]에 따라 다시 흠반공과 을제공도 여왕의 시중을 들도록 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왕의 남편이 음갈문왕이다. 이종욱은 음갈문왕을 흠반공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남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화랑세기』에서 남편의 한 사람이라고 한 을제공에 대해서 “원년(632) 2월 을제공에게 국정을 맡아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경잡기』에서는 선덕여왕의 남편을 갈문왕 김인평(金仁平)이라고 하였다. 선덕여왕은 그 이름과 같이 많은 불사(佛事)를 이루었다.
황룡사구층목탑(643년)을 비롯하여 분황사(634년)와 영묘사(635년) 등을 완성했고, 636년(선덕여왕 5) 병이 들었을 때에는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어 승려들을 모아 『인왕경』을 강설케 하고 100명의 승려에게 도첩을 주었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자장법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첨성대가 세워진 것도 선덕여왕 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법화경』에 의하면 ‘어린 아이가 장난으로 모래탑을 쌓더라도 한량없는 복락을 받아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그렇게 많은 불사를 행했음에도 생전에 반란과 외침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녀의 무덤이 사천왕천의 위에 있으니 사후에는 도리천에서 편안함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