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문화가 우리의 민족적 정서와 미학을 드러내듯, 동리와 목월도 우리의 민족적 정서와 정체성의 대표자들입니다. 동리목월문학관이 경주 시민은 물론, 문학하는 이들, 예술인이 염원하는 경주의 자랑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동리 선생과 목월 선생은 이하 동리와 목월로 표기한다)”
시(詩)에 있어서의 목월과 소설에서의 동리를 함께 아우르면서 그들 문학의 본향인 경주에 그들의 문학적 성취를 착근시키기위해 강력한 추진력과 열정으로 이뤄낸 문학관 건립은 발로 뛰었던 땀과 고충의 혈흔이었다. (사)동리·목월기념사업회는 2000년 12월, 뜻있는 이들이 모여 동리·목월선생의 정신문화를 견인하는 문학의 전당 ‘동리·목월문학관’건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예산확보와 부지선정과정(총 7~8개소의 후보지)에서 추진에 어려움을 겪다가 2006년 문학관을 건립했다.
지난해 연말 동리·목월문학상 운영조례(안) 제정을 두고 벌어진 논란과 그동안 지역에서 동리·목월과 관련된 사업이 추진될 때마다 어려움이 있었기에 한국문단의 거봉인 동리·목월선생의 위상이 후손들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문학관 건립의 본래 취지와 정체성, 동리목월 두 문인의 문학 본연의 정신에 충실해야 할 때다. 본고는 2000년부터 기념사업에 착수해 끈질긴 시련 끝에 최종적인 성과를 이끌어 낸 장윤익(전 동리목월 기념사업회장, 동리목월 문학관장, 한국문인협회 고문)회장과의 인터뷰와 장윤익 회고록‘산 넘고 물 건너(인문당)’에서 일부를 발췌해 구성했다.
동리목월문학관 개관 전, 순수한 염원과 뜨거웠던 열정으로 발화된 당시의 숨가쁘게 진행됐던 문학관 건립경위와 평탄치 않았던 우여곡절들을 짚어보면서 동리목월문학관의 정체성과 초심의 본질에 대해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동리목월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발족, “한국 현대문학사 금자탑 이룬 소설가 김동리와 박목월 기념하는 문학관을 고향 경주에 세워야”
2000년 9월 출향 인사 공선섭 전 리비아 대사와 경북대 김기찬 교수는 경주를 방문한다. 장윤익<인물사진> 회장과 서영수(시인) 선생을 상면한 자리에서 동리목월을 기념하는 문학관 건립을 발의하고 권유한 것이 지금의 문학관 건립 추진의 계기가 된다. 장 회장에게 전 리비아 공선섭 대사는 ‘여러 나라의 문학관을 방문해보고 감명을 받는다. 경주가 명실공히 세계적인 문화관광 도시가 되기 위해선 동리목월 두 거장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10월 공 대사에게 동리 선생 유족들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오면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첫 모임을 갖고 발기의 모체를 형성했다.
그해 10월 23일, 이근식, 권윤식, 장윤익, 서영수, 정민호, 김봉환 등의 문인들과 김태중(전 경주문화원장), 오해보(전 부시장), 김선학(동국대 교수), 박기태(경주대 교수), 김주현(경주대 교수), 신평(변호사), 박종택(새마을금고 이사장), 박형채(전 신라고 교장) 등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2월, 장윤익 위원장 외 13명이 참석한 가운데 ‘동리목월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1차 모임을 가지고 의견을 규합해 추진준비위원장에 장윤익 추진위원장을 선출하고 사무총장에 신평 변호사를 선임한 후 ‘동리목월 기념관 건립사업회’를 사단법인으로 등록할 것을 결의하고 실질적 활동을 시작한다. 한국 현대문학사의 금자탑을 이룬 소설가 김동리와 박목월을 기념하는 문학관을 고향 경주에 세워야 한다는 것은 때늦은 발상임을 함께 공감함에 따라 본격적인 추진 구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의 신문과 방송 등 언론기관을 통해 이 사업을 널리 보도해 전 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12월, 장윤익 위원장은 당시 이원식 시장과 면담, 논의를 하면서 황성동 동사무소를 기념관 건립부지로 지정할 것을 건의해 승인하는 방향으로 일단 가닥을 잡는다. 이후 각종 단체와 모임을 통해 기념관 건립 취지에 대한 설명과 협조를 계속 구해 나간다.
-‘동리목월 기념사업회’, 문학관 건립 기금 조성과 건립에 따른 제반 사항 해결하기 위해
장윤익 회장은 유족들의 동의와 협조를 얻기 위해 2001년 1월, 김동리의 차남 김평우 변호사와 3남 김양우 씨, 동리 선생 미망인 서영은 여사를 만나 경주에서 추진되는 기념관 건립 추진을 설명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동의를 얻어낸다. 한편, 서영수 위원은 박목월의 장남 박동규 교수를 만나 적극적인 지원 및 동참에의 확약을 얻어낸다.
2001년 2월 준비위원회의 적극적인 추진의 결실을 얻어 발기인 대회 및 동리목월기념관건립사업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회원, 문인, 예술인 등 33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룬다.
이후 ‘기념관추진사업회’의 명칭을 ‘동리목월 기념사업회’로 정한다. 우선 노동동 14번지(구 진성의원 빌딩 3층)에 사무실을 임대 개설하고 동리목월 기념사업회 현판식을 가졌다. 서울, 부산, 대구 등지의 문인과 학자, 각계각층의 유명인사와 동리·목월 유가족들은 물론, 경주시민들이 함께 모여 정관을 확정하고 임원을 선출해 앞으로 공식적인 추진의 기틀을 형성했다.
이에 회장에 장윤익, 부회장에 오해보·서영수, 사무국장은 신평 변호사가 선임됐고, 감사에 주영일·권순일 회계사가 선출되는 등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 고루 기념관 건립에 참여한다. 경향 각지의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에게 고문을 위촉하고 이사회를 조직 결성해 문학관 건립 기금 조성과 건립에 따른 제반 사항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국도시비 40억원 계상 승인 확정돼 마침내 문학관 건립 ‘착공’
한편, 동리목월기념사업회가 사단법인 인가를 받기 위해 제반 준비에 착수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유지와 문인들이 회원으로 등록하면서 협조와 찬사를 보내왔지만 문학관 건립의 막대한 예산과 부지 선정에 따른 어려움이 있었다.
4월, 경주시와 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지방비 20억(경상북도비 10억, 경주 시비 10억), 국비 20억의 기념관 건립 지원금을 신청해 경상북도 도지사로부터 도비 10억 지원 결재가 돼 도에서 문화관광부에 20억 국비 지원 예산 계상을 신청했다. 문화관광부 장관의 승인 결제가 되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노력과 지원이 있었다.
목월의 아들 박동규 교수와 동리의 미망인 서영은 여사의 노력을 간과할 수가 없다. 당시 김일윤 의원과 하선규 보좌관의 헌신적인 지원도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기획예산처를 방문해 건립의 당위성을 설명했으나 비관적인 분위기였고 기념관 건립 사업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두고 고심한다. 이에 당시 민주당 한화갑 의원, 민주당 구동수 전문위원, 김중권 민주당 대표, 이미경 의원 등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낸다.
2001년 8월 동리목월기념사업회는 장윤익 회장의 투지와 끈기가 원동력이 돼 지역 국회의원, 전국구 국회의원,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경상북도 의원, 경주시의원 등 2373명의 서명을 받아 국제 펜 클럽 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 경주문화원 등의 공동이름으로 문화관광부와 기획예산처에 청원서를 제출한다. 9월, 동리목월 기념사업회가 사단법인의 인가를 받고 당시 박형채 사무국장의 치밀한 업무로 10월 등기를 완료한다. 이어 6월 하순경에는 다소 절망적이었던 예산이 11월 부활했다는 낭보를 접한다.
12월, 국비가 국회에서 건립지원금으로 통과돼 2002년 예산으로 확정됐으나, 국비 지원액을 전체 액수 40억원의 30%만을 지원한다는 규정으로 국비 12억원만이 통과된다. 도비도 30%를 적용해 8억 4000만원을 계상해 2년의 건축 기간을 감안해 2002년엔 4억 2000만원을 도의회에서 통과시킨다. 나머지 19억 6000만원이 경주시의 몫으로 남게 되고 경주시가 예상한 10억 외 9억 6000만원은 시 예산으로는 큰 부담이 된다.
사업회는 실무자와의 면담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와중, 2002년 3월 기념관 건설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기념관 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건설추진위원들은 7월, 효석문학관, 청마문학관 등을 견학하고 계획을 세워 경주시장 및 관계 공무원들과 논의하는 등 도비 증액을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드디어 도비 1억원이 증액되고 나머지 18억 6000만원의 시비 지원금은 통과된다. 각고의 노력 끝에 국비(12억원), 도비(9억 4000만 원), 시비(18억 6000만원)의 계상 승인이 확정돼 마침내 문학관 건립이 착공되는 순간이었다.
-2006년 마침내 개관, ‘장윤익 회장의 진두지휘와 많은 이들의 문학관 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와 노고 있었기에 가능’
그러나, 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그 해를 넘기게 된다. 해가 바뀌면서 부지 문제가 백가쟁명 식으로 흘러, 사업추진은 점점 어려워져가고 있었다. 기념사업회 위원들은 경주교육문화회관 옆 부지, 보문단지 입구 시립수목원, 황성숲 옆 유휴지, 충효동 수도산 입구, 성건동 동리 생가 옆 부지 등의 예상 부지들을 답사하며 적합한지를 점검하고 검토했으나 결정이 쉬이 되지 않던 차에 서울의 동리 선생 집이 매매된다.
동리의 2남 김평우 변호사와 3남 김양우 씨는 기념사업회에 사람을 보내 유품목록을 작성하기로 의논하고 보내주었다. 7월, 부지 예정지였던 보문단지 부지가 부결되면서 부지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뒤 이은 난관이었던 것.
장 회장은 “당해를 넘기면 어렵게 확보했던 예산이 불용예산이 돼 국비와 도비를 반납하는 결과가 올 것만 같아 암담한 심정이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후, 당초 기공 계획보다 2년 늦어진 후 최종 선정된 곳이 진현동 산 550-1번지인 불국사 맞은편 시청 석굴로 관리사무소가 기념관 부지로 적합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8월, 당시 기념관 건립에 적극적이었던 백상승 시장은 ‘문학관은 세계인들이 찾는 명소가 돼야 한다’며 힘을 보탠다. 장 회장은 “이렇듯, 고비고비 어려운 과정을 거쳐 11월, 드디어 부지 현장에서 전국에서 온 문인들과 경주 시민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공식을 갖게 됐습니다. 감격의 첫 삽질에 그간의 시간들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토목 공사가 진행중이었을때도 보다 나은 문학관을 위해 기념사업회는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거듭했지요”라고 당시를 돌아봤다. 2005년 말 공사는 마무리 되었고 2006년 3월 24일, 마침내 개관식을 하면서 오늘날의 동리목월문학관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장윤익 회장의 진두지휘는 물론, 많은 이들의 문학관 건설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정과 노고가 있었기에 착실히 진척됐던 개관이었다. 수많은 난관을 거쳤지만 강력한‘당위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