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전’은 양지(良志)스님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갑옷 차림에 화살·칼 등을 든 수호신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수호신 조각의 정체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는 견해가 엇갈린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일부 미술사학자는 그것이 사천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팔부신중(八部神衆)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삼국유사』 「의해」편 ‘양지사석’조에 천왕사 탑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양지가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이와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불교미술사에서 팔부신중은 9세기가 되어야 나타나며, 아무리 빨라도 8세기 말 이전에는 나올 수 없다. 그리고 사천왕사지 녹유사천왕상은 악귀를 밟고 있다는 점에서도 사천왕상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사천왕상은 한국 불교에서는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인 천왕문에서 흔히 목조각이나 소조상 형태로 만날 수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발밑에 깔려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악귀(생령)를 밟고 있는 모습으로 사천왕사의 ‘녹유전’에 나타나는 형태와 유사하다. 그런데 2006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사천왕사 터를 다시 발굴한 결과,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전은 3종류만 확인이 되어 학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녹유전은 동·서 목탑터 모두에서 같은 양상으로 출토됐는데, 기단 계단을 중심으로 각 면에 6개씩(3쌍×2조), 모두 24개(4면×6개)가 배치돼 있었다. 사천왕상은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4개의 상이 한 세트를 이뤄야 하는데, 왜 4종류가 아니고 3종류뿐이며 더구나 탑 하나를 장식한 사천왕의 숫자가 무려 24개나 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천왕이 아닌 다른 수호신으로 봐야 하지는 않을까? 한편 경주대학교의 임영애교수는 또 다른 견해를 밝히고 있다. “사천왕도 아니며, 그렇다고 팔부신중도 아닌 신왕(神王)으로 보아야 한다. 먼저 이것이 사천왕이라면 북방을 관장하는 사천왕은 반드시 손에 탑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례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나아가 활이나 화살을 든 모습을 보고 사천왕상으로 보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이런 사천왕상이 등장하는 것은 9세기 이후로, 사천왕사는 그 전에 지은 사찰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또한 팔부신중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신장의 수가 8개가 아니라 24점에 달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또한 8종류의 상 형태가 나타나야하는데 3종류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각종 불교경전을 보아도 팔부신중은 8명이라 했지 그 외 숫자를 거론한 사례는 없다. 따라서 이 녹유전 상은 불법 전반을 수호하는 ‘신왕’으로 보아야 하며, 이는 불설관정경과 같은 불교 경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강우방은 또 이렇게 주장한다. “사천왕사의 사천왕상은 불법(佛法)의 수호신인 동시에 삼국을 통일한 통일신라의 수호신이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북방에 위치한 흉노족의 후예이기 때문에 굳이 북방을 방위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사천왕상 중 북방에 맞서 국토를 수호하는 다문천상은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동·남·서쪽을 수호하는 3종류의 천왕만 만든 것이다” 과연 사천왕사지의 녹유전은 사천왕일까? 팔부신중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신장상일까?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해서 문자에 의존해서는 진리를 깨칠 수가 없다고 했다. 사천왕, 팔부중, 또 다른 신장상 등에 집착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외세를 몰아내고자한 신라인의 간절한 염원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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