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藏臺 - 玉峰 東都遺跡尋來遍 (동도유적심래편) 동도의 유적을 두루 찾아다녔지만 澹澹長空鳥不過 (담담장공조불과) 고요한 하늘에 새도 날아가지 않네 惟有金藏臺下水 (유유금장대하수) 오직 금장대 아래로 흐르는 물만이 春風猶帶舊煙波 (춘풍유대구연파) 봄바람에 옛 풍광을 띠 두르는 듯하네 이 시는 옥봉(玉峰) 권위(權暐,1552~1630)의 『玉峰集』卷1,「金藏臺」로, 옥봉은 옛 성대했던 신라의 자취를 찾아 경주에 왔건만, 이미 이전의 성대한 모습은 어디가고 새도 찾아들지 않는 금장대와 유유히 흐르는 서천(西川)만이 자신을 맞이하니, 그의 애상함은 봄바람에 씻기듯 지난 날의 풍광이 되살아나는 듯 지난날을 회고하며 감상에 젖는다. 안동출신의 옥봉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유일재(唯一齋) 김언기(金彦璣)·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경주의 문인과 교유가 깊었으며, 경주 곳곳을 유람하고 『동경일록(東京日錄)』과 「골굴십운(骨窟十韻)」등 시문을 다수 남겼다. 앞서 오봉 이호민과 오한 손기양의 글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금장대 전투와 승전보를 전해 듣던 격전의 금장대를 언급하였다면, 옥봉은 왜란 이후 금장대에 올라 옛 신라의 전성기를 떠올렸다. 元日在慶州 次李延陵君好閔韻 - 河受一 鞅掌於王事 (앙장어왕사) 나라 일에 바삐 행하였고 一年三度來 (일년삼도래) 일 년에 세 번 경주를 찾았네 黃花初爛熳 (황화초난만) 처음엔 국화가 활짝 피었으나 白雪政飄回 (백설정표회) 어느새 흰 눈만이 흩날리네 鍾帶前朝恨 (종대전조한) 종소리는 이전 왕조의 한을 품고 城含此日哀 (성함차일애) 성곽은 금일의 슬픔을 머금었네 偶逢新歲正 (우봉신세정) 우연히 새해의 첫날을 맞이하니 瑞旭照金臺 (서욱조금대) 상서로운 빛이 금장대를 비추네 위 시는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1553~1612)의 『松亭集』卷1,「元日在慶州 次李延陵君好閔韻」으로, 새해첫날 경주에 머물며 연릉군 이호민의 시에 차운한 작품이다. 하수일은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문장(文章)과 사장(詞章)이 뛰어났고, 형조좌랑·형조정랑을 거쳐 현감까지 지낸 조선중기의 큰 인물이다. 그는 공무에 바삐 행하면서 경주를 여러 차례 다녀갔다. 이때 화려했던 경주의 모습을 황화(黃花)로 표현하면서, 지금은 을씨년스럽게 눈만 내리는 풍경을 통해 지난날의 흥망을 드러냈다. 또한 종소리와 성곽도 지난날의 슬픔을 머금었으니, 바라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그 애상함이 느껴진다. 드디어 새해의 날이 밝아 상서로운 빛이 신라의 패망과 임진왜란의 상처로 얼룩진 금장대를 비추니 앞으로 성대한 기운이 일어나리라 스스로 다짐해보는 듯하다. 金藏臺 - 曺偉 坡陀斷岸俯江皐 (파타단안부강고) 험준한 깎아지른 벼랑에서 강을 굽어보니 乘興登臨望眼遙 (승흥등림망안요) 흥이 올라 대에 오르니 멀리까지 다 보이네 古家纍纍欹石獸 (고가류류의석수) 겹겹의 오랜된 집에는 석수가 한쪽에 높고 靑山隱隱聳金鰲 (청산은은용금오) 은은한 푸른 산 가운데 금오산이 우뚝하네 傷心廢苑煙花閙 (상심폐원연화료) 마음 아프게 황폐한 동산엔 봄 경치 가득하고 滿目空城塔廟高 (만목공성탑묘고) 눈에 가득 텅빈 성에는 탑묘(塔廟)만 높아라 天地無情如昨日 (천지무정여작일) 천지는 정이 없기가 어제와 같고 人間蠛蠓等秋毫 (인간멸몽등추호) 인간은 멸몽(蠛蠓)이라 사소한 털과 같도다 臺上蒼茫煙景遲 (대상창망연경지) 아득한 금장대 가의 안개 낀 경치 더디고 那堪吊古更憑危 (나감조고갱빙위) 어찌 옛일을 슬퍼하여 다시 높은 대에 기대리오 丘園薺麥爭春色 (구원제맥쟁춘색) 동산의 보리와 냉이는 봄빛을 다투고 城郭人民異昔時 (성곽인민이석시) 성곽과 백성들은 옛날과 다르구나 阮籍聊興廣武嘆 (완적료흥광무탄) 완적은 애오라지 광무의 탄식을 일으켰고 鄒湛空作峴山悲 (추담공작현산비) 추담은 부질없이 현산의 슬픔을 지었더라 興亡萬古長如此 (흥망만고장여차) 흥망은 만고에 항상 이와 같거늘 不用哀歌詠黍離 (불용애가영서리) 슬픈 노래로 서리편을 읊조릴 필요가 없다네 위 시는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의 『梅溪集』卷2,「金藏臺 二首」작품으로, 「계림팔관서(鷄林八觀敍)」에 상세히 설명되어있다. 1수는 금장대에 올라 멀리바라보니 오래된 집들과 김시습의 자취가 서린 금오산이 바라보인다. 성터는 황폐해지고 봄은 찾아와 꽃을 피우고 탑묘만 남았으니 마음 더욱 슬프다. 2수는 금장대의 빼어난 경치가 좋으나, 옛일을 생각하면 슬픈 생각이 앞서고, 다시금 봄은 찾아왔으나 성곽과 백성은 신라의 것이 아니라 더욱 슬픔이 밀려온다. 또한 진(晋)나라 완적(阮籍)이 광무성(廣武城)에 올라서 옛날 초한(楚漢)의 전쟁하던 터를 보고 탄식함과 진(晋)나라 양호(羊祜)가 형주(荊州)의 도독(都督)으로 있을 때에 산수풍경을 좋아하여 매양 현산(峴山)에 올라서 술을 마시며 노닌 일화를 거론하며, 신라의 패망과 산수경치의 매몰을 아쉬워하고, 주(周)나라가 쇠약하여 동으로 옮긴 뒤에 시인이 옛 서울을 지나며 읊조린 서리편(黍離篇)의 ‘옛 도읍엔 기장이 우거졌다[彼黍離離]’탄식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옛 도읍을 그리워한들 다시금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없음을 작자도 알았을 것이다. 즉 오봉 이호민은 금장대에서 왜란 때 격전의 장소로 승전보를 전해 들었고, 옥봉 권위, 송정 하수일, 매계 조위는 금장대에 올라 폐망한 신라의 울분과 옛 도읍의 애잔함을 노래하였다. 오랜 시절 신라와 고려, 조선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장면을 담은 금장대는 당대의 시인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얘기를 풀어주길 바랐을까? 시인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시절의 아픔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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