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아버지(석당 최남주 선생)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거의 잊혀져가고 있는 차제였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선친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석당 선생의 자제 중 한 분이신 코리아타임즈 최정대 칼럼니스트의 말이다. 본지에서 석당 선생(1905-1980)을 기록으로써 재조명하는 일이 만시지탄임을 금할 길 없다. 흙속에 숨어있던 진주를 이제야 제대로 발견한 듯한...,기자는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업적을 부족하게나마 이렇게 기록할 수 있음을 영광스럽게 여길 뿐이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잊혀가는 우리 문화유산 발견과 발굴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석당 선생은 항상 문화재 발굴 보존운동이 무력으로 적과 싸우는 것보다 더욱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이라고 설파했다. 김광해 전 신라문화동인회회장은 ‘이처럼 선생은 아무도 이끌어 주는 이도, 알아주는 이도 없이 홀로 신라의 얼을 찾아 먼 항해를 계속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번호 하(下)편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 이후에 활약한 선생의 업적 등에 대해 살펴보고 수 편의 육필 유고를 통해 선생이 직접 증언하는 주요 발굴 대상과 발굴 에피소드 등을 소개한다. 이 기사 역시, 석당 선생의 자제이신 최정대 선생과의 전화 인터뷰 및 제공해주신 사진들과 자료집(『박물관학보(한국박물관학회, 2007)』 -석당 최남주 선생 탄생 102주년 기념-’)을 바탕으로 했으며 『경주문화 제 17호(2011)』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 최남주의 생애(김광해 전 신라문화동인회회장)-에서 발췌인용해 구성했다. -문무대왕의 수중릉 발견은 선생의 결정적인 제보로, 발견의 계기 된 역사적 사건 1926년부터 1939년까지 불교문화의 보고인 경주 남산불적의 학술 조사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여, 수많은 불교문화재들을 발견한 선생의 경주남산불적 조사연구에 대한 열의는 일평생 동안 지속됐다. 특히, 1938년에는 우리나라 미술 사학계 개척자인 우현 고유섭과 문무대왕의 장지와 그 유적이 있는 동해구를 답사한 바 있다. 문무대왕을 신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왕이라고 설파했던 석당 선생은 당시 “감은사지 근방에서 물속에 잠긴 ‘돌거북’을 봤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그 돌거북은 은사와 문무대왕에 관한 비석의 구부(龜趺)일 것이라 추측하고 감은사 부근 용당리 마을 용소(龍沼)를 지목한다. 현지를 수십 차례 답사해 돌거북의 소재를 추적하나 홍수 등으로 인해 매몰되어 끝내 그 돌거북을 발견하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한 선생은 고유섭의 학문을 이어받은 황수영에게 그 돌거북 이야기를 한다. 황수영은 1967년 용소 발굴(모터펌프로 물을 퍼내어 발굴하여 돌 거북을 찾아내는 작업) 계획을 세웠다. 결국 ‘돌거북’은 비좌의 기능을 한 구부가 아니라 문무대왕의 장골(葬骨)처를 표시하는 대개석(大蓋石)이었으니, 이는 문무대왕 수중릉 확인이라는 엄청난 경사로 현실화되었다. 결국 1967년 문무대왕의 수중릉 발견은 최남주 선생의 결정적인 제보로 발견한 계기가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일제가 우리문화를 마음대로 침탈하려는 시도에도 수없이 저항하는데, 석굴암의 감실 앞에 놓였던 ‘유마거상’과 ‘십일면 관음보살상’ 앞에 놓였던 아담한 5층 석탑을 당시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가 한일합방 직후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확인한 후 소재를 추적하여 반환노력에 나섰다. 또한 일본인들에 의해 한국문화재 약탈, 훼손이 절정에 달할 시기에 선생은 1935년 불국사 부근 유적지를 답사 중 신라 33대 성덕왕릉의 유물이 도굴범에 의한 도굴미수 사실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경주 경찰서와 관계당국에 신고해 왕릉 내의 금관 등 다른 중요한 유물이 도굴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해방 직전에도 수많은 유물들을 발견 및 발굴해 그 대부분을 경주박물관에 기증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생 마감할 때까지 우리 문화유산 발견과 발굴, 손에서 놓지 않아 김광해 전 신라문화동인회회장은 “해방을 맞이한 이후 선생은 경주고적보존회를 조직해 경주뿐 아니라 조국의 문화재보존을 위해 가산을 팔아 경주의 문화재보존운동에 앞장선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했다. 경주고적보존회는 일제가 우리 문화를 침탈하려 만든 고적보존회가 아닌 석당 선생에 의해 재조직된 순수한 시민단체였다. 한국 전쟁 중에도 사재를 들여 무열왕릉비각을 건립하고 석탈해왕릉 비석을 세워 허물어져가는 문화재보존에 앞장서기도 했다. 1962년에는 경주남산 옛 철와사 자리 아래 골짜기 부근을 답사하던 중 백색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신라 최대의 석불 두상을 발견했다. 또 1971년 겨울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김유신 장군 통일기도장과 그 유적지를 답사한 결과, 김유신장군 통일기도장인 열박산(咽薄山) 유적지를 울주군 내와리에 소재한 해발 901 미터의 열박산에서 발견해 사학계뿐만 아니라 타 학계에서도 각광을 받았다. 특히 선생은 오래전부터 울주군 반구대의 선사암각화가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인지했다. 1968년 봄 선생의 안내로, 당시 영남대학교 이선근 총장과 영남대 이은창 박물관장과 반구대 유적의 암각화를 찾으려고 방문했으나 그 지역 댐이 수몰돼 찾지 못했다. 그 후 이 사실을 전해들은 동국대 황수영 교수는 동국대 박물관팀과 함께 반구대가 수몰되지 않았던 겨울, 암각화를 발견해 세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결국, 반구대 암각화의 결정적 발견 동기도 석당 선생이 제공했던 것. 선생은 이 외에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만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잊혀가는 우리 문화유산 발견과 발굴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평양 기생에게 금관 씌워 말썽’, ‘왕릉을 파헤치니 하느님이 노하셔서 흙비를 내리게 했다’ 한편, 석당 선생은 주요 언론사(1973년,1975년 조선일보, 1961년과 62년, 63년 한국일보, 1962년 동아일보 등)에 기고한 육필 유고 등에서 당시의 생생한 발굴현장과 발굴 경위와 여러 에피소드 등을 소개한 바 있다. 일인들의 음흉한 구상들을 직접 목격해 온 목격자로서, 일제의 문화재 약탈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던 조국의 역사에 이들의 흉계를 고발하면서 감동적인 달필로써 증언했다. ‘서봉총과 서전왕’에서는 “나는 고분 중에서도 학술적인 관심을 초월해 서봉총에 대해 무한한 향수를 느끼고 있다”면서 서봉총은 발굴되기 전 고추밭이었으며 발굴에서 나온 흙은 구역사(현 경주시립도서관) 건축에 사용했다는 사실 등을 밝혔다. ‘서양 황태자가 천년의 잠을 깨웠다’는 대목에선, ‘목관이 파괴된 가운데 눈부신 가을 햇살을 받은 황금 보관과 장신구 일군은 천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먼 나라의 황태자에 의해 지상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썼다. ‘평양 기생에게 금관 씌워 말썽’이라는 기고에서는 ‘서봉총 발굴 때 이상하게도 토우(土雨)가 연 이틀이나 내려 지방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왕릉을 파헤치니 하느님이 노하셔서 흙비를 내리게 했다고 당황하던 일, 발굴 책임자인 소천(小泉)씨가 평양에서 서봉총 발굴 유물을 전시 중 차능파라는 명기에게 금관을 씌운 사진이 신문에 보도돼 총독부로부터 시말서를 쓰게 된 불미스러운 사건’등을 생생하게 술회했다. 또,‘박물관 유물도난 사건’에서는 박물관 금관고에 진열된 금관총출토의 유물 중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금관만 남겨둔 채 순금제를 비롯한 부속 유물들이 감쪽같이 없어진 사건이 발생한 일 등 당시의 정황을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기고했다. -성덕대왕신종 운명 풍전등화,‘전쟁 물자가 달리니 탄환 만드는데 사용함이 적합’ 또‘박물관장의 장쿨(贓物)취득 사건’에선 ‘당시 일인들은 우리의 소중한 유물들을 부당한 방법으로 사장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전해오던 전세(傳世)품은 물론, 조상들의 안식처인 고분에 이르기까지 유물탐색의 음흉한 야욕을 뻗쳐 평양, 개성, 경주 등을 무대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고 했다. ‘조선총독의 망언’에서는 겨레의 중보(重寶)인 석굴암이 한일합방직전인 통감부 시대 경주의 어느 우체부가 발견했음을 알렸고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니 전부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고 명령을 내린 일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당시 총독이 경주박물관에서 성덕대왕신종(에밀레 종)을 둘러보고는 ‘이 종은 전쟁 물자가 달리니 탄환 만드는데 사용함이 적합하다’고 까지 극언을 한 일을 전하며 당시 이 종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음을 증언했다. 그리고 석굴암 소석탑도 자취를 감춘일, 오리무중이 된 다보탑의 석사자, 일본 ‘정양헌’이라는 요정에 있다가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와서 감개무량했다던 불국사의 사리석탑 등의 이야기도 술회했다. ‘남산 신성비의 발견’에서는 1934년 발견한 남산신성비는 신라 관명과 지명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비문에 흐르고 있는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사명감까지 전했다. 또 ‘일제강점기에 경주에서 만난 일인 학자들’에서는 학자의 양심을 버리지 않고 기풍을 지니고 있던 학자 중에서 일본 고고학계 대부라고 불리는 하마다 고사쿠와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숭고한 신라문화 앞에 머리를 숙였던 진정한 학자였다고도 술회했다. 이외에도 ‘천군리 석탑 복원’, ‘원원사지 동서석탑 복원이야기’, ‘경주역 광장 3층 석탑 복원 이야기’, ‘동해구 유적답사와 우현 고유섭’, ‘일정기에 발견한 신라 금석문’등과 해방이후 5년 계획이 한국 전쟁으로 무산됐던 아픈 시간들에 대해서도 썼다. 이 밖에‘경주 구미산의 사적 고찰’이라는 선생의 논문은 1972년 구미산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성역화 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최정대 선생은 끝으로 “선친은 경주의 자랑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랑이라고 자부합니다. 타계하신지 40여 년이 된 시점에 이렇게 재조명돼 자손의 한 사람으로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특히 경주에서 아버님이 올바르게 알려지고 제대로 평가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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