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지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는 원래 부근 민가 옆에 있던 것을 1928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기단과 간대석은 보이지 않고 지주만 남아 있다. 지주의 높이는 2.3m 정도이며 너비는 50㎝이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공이 지주 아래위와 중앙의 3곳에 뚫려 있는데, 아래위 구멍은 네모나고 가운데 구멍만 둥글다.
이 당간지주로부터 30m 동편에 석조 귀부가 놓여 있다. 이 귀부 동쪽 약 26m 지점에 또 1기가 있다. 모두 비신과 이수 등이 사라지고 귀부의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도 동일하다.
서쪽 귀부는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크기는 길이 약 210cm, 폭 약 160cm이고, 귀부의 등에는 비좌 주변의 연화문과 육각형의 귀갑문이 정교하며, 당초문을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특히 꼬리 조각 수법이 일품이다.
동쪽 귀부의 방향 역시 서쪽 귀부와 마찬가지로 남향이고 그 크기는 길이 약 210cm, 폭 175cm로서 서쪽 귀부에 비하여 폭이 약간 넓은 편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동측 귀부에는 사천왕사적비가, 서측 귀부에는 문무대왕릉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에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비의 비편을 정조 20년(1796)에 발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비편의 탁본 4장(비편 2개의 앞뒤면)이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문무왕비편은 그 후 사라져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1년에 하단부가 경주시 동부동 경주문화원 인근 민가 정원에서 발견되었고, 2009년에는 상단부가 동부동의 한 주택 수돗가에 박혀 빨래판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음은 해독이 가능한 부분의 내용 중 일부이다.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한서(漢書)에 의하면 투후 김일제(金日磾)는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한무제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한나라에서 공을 세워 투후라는 작위를 받았다. 성한은 투후 김일제의 7대손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비문 등을 근거*로 성한이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이며, 신라 문무왕의 15대조가 된다고 추정한다.
이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이사금’조의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고…” 의 세한이 성한이라는 것이다. 세한과 성한은 그 발음이 유사하다. 세한을 『삼국유사』 「기이」편 ‘김알지 탈해왕대’조에서는 열한(熱漢)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문무왕비에 기록된 성한왕 설화가 김알지의 설화와 너무나 유사하여 2대손인 김세한이 실제 경주 김씨 왕가의 시조이고, 김알지는 권위를 위해 후대에 추승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사역(寺域)의 남쪽 귀부 주변에서 작은 석교가 발굴되었다. 중문지에서 남쪽으로 40m 지점으로 양편 약 3.6m 거리에 동서 양편 2개소에 각각 만들어져 있다. 폭 60cm, 깊이 50cm 내외의 배수로 위에 약간의 아치형을 이루고 있는 작은 돌다리이다.
석교는 평교[平橋, 일명 보다리, 널다리]의 형식으로 귀틀석, 청판석, 엄지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리 바닥을 형성하는 청판석은 3개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부분은 약간 아치 형태이나, 양단은 편평한 모습으로 소형이다.
동쪽 석교 북쪽으로는 약 30여cm 크기의 보상화문전과 무문전이 일부 깔렸음이 확인되어 원래 보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배수로 위의 작은 돌다리를 건너 중문으로 출입하였을 것이다.
*이외에도 흥덕왕릉 비편에 태조 성한의 24대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성한왕은 김인문묘비, 진철대사탑비문(眞澈大師塔碑文), 진공대사탑비문(眞空大師塔碑文)에도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