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발자국에 몸을 얹고
-전동균
한낮에도 검은 입 벌린
상원사 골짜기
정체불명의 짐승 발자국이 외줄로 나 있다
가시덤불을 훌쩍 뛰어넘어
얼음폭포 쪽으로
까마귀는
비구니들 사는 자장암 숲에서 울고
서답 빨래처럼 펄럭이고
보메기의 얼음들 쩡쩡 갈라터지는데
눈 덮인 잡목가지 속으로 얼굴을 묻은 사람 ​
짐승 발자국에 몸을 얹고
부르르 떨고 있는 사람
-서답 빨래처럼 펄럭이는 까마귀의 울음
암시와 생략이 독특한 비의를 품고 있는 서사적 묘사의 전형 같은 작품이다. 이런 시는 시인이 남겨놓은 여백을 독자가 채워가는 상상력으로 읽어야 한다. 시는 반쯤은 드러내고 반쯤은 감추는 것이 그 속성이기 때문이다.
첫연에서 화자는 한낮에도 죽음의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으스스한 상원사 골짜기, 가시덤불을 훨씬 넘어 빙폭 쪽으로 나 있는 외줄의 짐승 발자국을 발견한다. 가파르고 아슬아슬한 길에 찍힌 ‘짐승 발자국’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화자의 시선은 이제 “비구니들 사는 자장암” 쪽으로 내려온다. 하늘을 향해 뻗은 전나무 숲길이 좋은 그곳에서 까마귀가 우는데, 그 울음이 참 묘하고 불길하다. 울음은 개짐 따위의 빨랫감, 서답 빨래가 흔들리듯 빠르게 나부낀다. 돌올한 이 직유의 힘! 게다가 보메기의 얼음은 쩡쩡 갈라터진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흔적을 본다. 정체불명의 짐승이 비구니 한 분을 물고 가파른 얼음폭포로 끌고 갔음이 암시된다.
그 얼음은 눈물마저 얼어 갈라터지게 한다. 꺽꺽, 눈 덮인 잡목가지 속으로 얼굴을 묻은 사람, 짐승 발자국에 몸을 포개고, 부르르 떨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이어서 따라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더 상상력을 작동시킬 수밖에 없다. “짐승 발자국에 몸을 얹고/부르르 떨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애지중지 키운 비구니의 아버지일까? 아니면 그녀를 지독히도 사랑했던, 그러나 그녀의 출가를 막지 못했던 한 사내일까? 그 모든 것들은 이제 독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시는 이렇게 많은 것을 품고 있다. 자신이 써야 할 내용의 70%는 감추고 30%만 드러내어 감춰진 부분은 독자가 찾아 읽게 한다는 지론을 펼친 이는 헤밍웨이다.
안으로 칩거하면서 문학이 주는 이 비의를 풀어가라고 이 엄동의 계절이 주어진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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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시인 약력
경북 안강 출생. 1987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고요 이야기』, 저서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외 7권, 1996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경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