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들이 걸어온 아득히 먼 길을 이름없는 돌처럼 따라갔고 무너진 신라탑 다시 일으키며 흙 밑 뒤져 청태 낀 기왓장과 토기편, 비편들을 수없이 발굴해 이 민족 역사를 증언했고 신라의 얼을 찾아 평생을 경주의 산야를 헤맨 나그네’ -석당 최남주 선생 추송비(2001년)에서. 우리나라 고고학계와 박물관학계의 여명기였던 1926년, 우리나라 민간문화재 보호 단체의 효시인 경주고적보존회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경주박물관 창설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여해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박물관 문화의 개척과 신라문화재 보존과 경주를 위해 평생을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었던 석당 최남주(石堂 崔南柱, 1905-1980) 선생. 경주의 산야와 남산의 이름없는 골짜기에 무수히 산재한 문화재에 선생의 따스한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평생을 신라고도 경주를 지키면서 우리민족문화재 보존과 발굴에 헌신한 최남주 선생의 업적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특집으로 다뤄, 2회(상,하)로 연재하고자 한다. 이번호 상편에서는 최남주 선생의 일생과 주요업적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다음호에 이어질 하편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사이의 주요업적과 이후 업적 등에 대해 살펴보고 선생이 생전에 신문과 월간지에 발표한 수 편의 육필 유고를 통해 선생이 직접 증언하는 주요 발굴 대상과 발굴 에피소드 등을 소개한다. 본 기사는 석당 선생의 자제이신 최정대(코리아타임즈 칼럼리스트) 선생이 제공해주신 사진들과 자료집(『박물관학보(한국박물관학회, 2007)』 -석당 최남주 선생 탄생 102주년 기념-)을 바탕으로 했으며 『경주문화 제 17호(2011)』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 최남주의 생애(김광해 전 신라문화동인회회장)-에서 발췌인용해 구성했다. 여기, 졸고로 선생의 지순하고도 방대한 업적을 소개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평생을 민족문화보존에 헌신한 석당 최남주 선생의 숭고한 정신이 특히, 경주에서 올바르게 평가되고 제대로 기록되기를 바래본다. -최남주 선생의 일생, 그렇다면 선생이 일찍이 이토록 문화재에 안목이 깊었던 배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석당 선생은 고운 최치원의 29대손으로 대대로 경주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천도교(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후예기도 하다. 성장하면서 집안이 동학혁명의 주동으로 몰려 가산이 기울어졌다. 1918년 천도교에 입교 후 상경해 최시형의 장남 최동희 댁에서 기숙하면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고보에 입학한다. 보성고보에 입학한 이후 은사인 황의돈 박사의 가르침과 영향으로 경주의 흩어진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방학 때면 경주의 유물이나 기와를 수집해오라는 과제를 내줘 불교문화의 보고인 남산유적을 헤매는 일이 버릇이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황의돈은 최남주에게 경주는 한국고대문화의 성지요, 그 정수임을 깨우치게 했다. 경주로 내려와 초등학교 교편을 잡기도 했는데, 1925년, 경주박물관의 전신이자 우리나라 민간문화재 보호단체의 효시인 경주고적보존회에 근무하게 된다. 비록 일제강점기이지만 우리민족의 문화재와 유물들이 일제에 의해 마구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선생은 1926년 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해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고고학계와 신라 문화재 보존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해방 이후에도 당시 폐허가 됐던 경주의 신라유적을 보존하고 이를 알리는 것이 민족정신을 선양하는 것이라 믿고, 아무도 돌보지 않은 외로운 길을 충실하게 걸었던 것이다. -1926년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와 함께한 서봉총 발굴, 고고학계에 이름 알려 선생은 1926년 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해 근무하면서, 개관직후 경주 고적 보존 선전의 첫 사업으로 임실군시찰단의 경주 방문시 불국사를 관람 후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공식 업무를 시작한 같은 해, 최남주는 그의 이름을 고고학계에 알리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1926년 10월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와 함께한 경주시 노서동에 위치한 서봉총 발굴이었다. 세계적인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황태자와 함께 신라시대 찬란한 황금보관을 발굴한 사실은 9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학계에 커다란 업적으로 남아있다. -최초의 남산신성비 발견, 원원사지 석탑 복원 등 한국전쟁 와중에도 끊임없이 경주문화재보존 연구에 전념하고 노년에는 백발 휘날리며 신라의 얼 찾아 유적들 답사 또한 최남주는 1934년 최초의 이두문인 육조체의 서법으로 구성된 최초의 남산신성비를 발견해 신라사와 고대 금석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남산신성비는 발견 당시만 해도 신라금석문 중 연대상으로 진흥왕 순수비 다음으로 최고(最古)의 비(碑)다. 1926년부터 1939년까지 우리나라 불교 미술의 보고인 남산불적의 학술조사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참여, 수많은 불교 문화재들을 발견했다. 또, 선생은 경주 외동읍 원원사지 석탑을 복원했으며 1932년, 1938년 우리나라 미술사학계 개척자인 고유섭 선생과 문무대왕의 장지와 그 유적이 있는 동해구를 답사했으며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 와중에도 끊임없이 경주문화재보존 연구에 전념했다. 선생은 한국 전쟁 이후 청빈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사재를 들여 1952년 무열왕릉비각을 건립하고 석탈해왕릉 비석을 세워 허물어져가는 문화재보존에 앞장섰다. 이후 선생은 1957년 흥덕왕릉 비단석을 발견해 왕릉의 주인공을 밝히는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했다. 1962년, 1965년 경주 천북면 동산리와 내남면 망성리 신라 최대 토기 요지 또한 선생의 업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후에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유신 장군의 통일기도장인 열박산 유적 지를 발견해 학계에서 각광을 받는다. 노년에는 백발을 휘날리며 신라의 얼을 찾아 유적들을 답사하며 신라의 문화와 경주를 국내는 물론, 외국의 학자들에게 올바르게 알리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한다. 그 결과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수훈, 1971년 서봉총 발굴의 인연을 통해 한국과 스웨덴의 문화교류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스웨덴 왕실로부터 최고 훈장인 바자훈장 기사장을 수훈한다. -“경주 유적으로 최옹의 손을 거쳐가지 않음이 드물다 할 정도로 신라 역사 배달부 노릇으로 75년 인생 쇠진” 석당 선생이 1969년 신동아에 기고한 ‘신라의 얼을 찾아 반세기’라는 글에서는 “올해로 내 나이 육십사세. 누대를 살아 온 왕도의 주민, 풀 한 포기, 기와 한 장에서도 선민의 위업과 숨결을 느끼며 땅속에 묻힌 역사의 징표를 찾아 헤매기를 반세기. 이재를 모르고 가산을 돌보지 않은채 이름없는 돌처럼 살아 왔으니 ..., 불교 예술의 보고 신라의 문화를 섬긴지 반세기. 어느 나라 상신(相臣)이 당대에 천년왕조를 나처럼 섬겼던가. 나는 자긍으로 살 수 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내가 잊을 수 없는 일들 중 아직도 흐뭇한 것은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현 스웨덴 구스타프(당시 황태자)의 방한과 서봉총 발굴이었다”고 썼다. 한편, 2001년 김유신 장군묘 입구 공원에 선생의 고고학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추송비 제막을 즈음해 쓴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칼럼에서는 ‘경주 유적으로 최옹의 손을 거쳐가지 않음이 드물다 할 정도로 신라 역사 배달부 노릇으로 75년 인생을 쇠진시켰다’ 면서 선생이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저승에 가서 신라 문화를 쌓아올렸던 선인을 만나면 부끄럽지 않음을 자부하고 신라의 향기를 온누리에 배달한 역사의 배달부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민족 문화유산 보존운동의 선구자 석당 최남주의 생애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생각” 전 신라문화동인회 김광해 회장은 『경주문화 제 17호(2011)』 -한국 고고학의 선구자, 최남주의 생애-에서 “선생은 한평생 청빈한 생활 속에 온갖 어려움을 딛고 오로지 나라 사랑으로 우리민족의 얼이 담겨있는 신라역사와 문화유산을 찾아 우리민족역사의 정체성회복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리하여 ‘고고학 선구자’로서 자칫 사라질 뻔 했던 일제강점기라는 한국역사의 암흑기에 우리문화유산을 지키고 일제에 의해 왜곡되지 않게 함으로써 근현대의 후학들이 고고학을 연구할 수 있는 그 기틀과 발판을 마련해 놓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일본인들의 문화적 침탈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분노했음은 여러 증빙자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면서 “일제의 수탈속에서 조국의 잊혀가는 문화재를 발견, 발굴보존해 민족혼을 고취시킨 진정한 애국의 길을 걸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때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계속된 선생의 불굴의 문화재에 대한 사랑은 오늘날 우리역사 지키기에 큰 교훈을 주고 있다. 또 “최남주 선생이 발견한 수많은 유물들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으나 일제강점기 때의 지각없는 일본인 학자들의 한인멸시풍조로 조선인 문화재 발견자 기록이 누락됐다. 일제에 계속적으로 저항하던 최남주는 그들의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1940년, 경주박물관직을 강제퇴직하게 된다. 또, 그의 수많은 업적과 노력을 일인들의 업적으로 위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최남주의 발견과 그의 업적이 애석하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후학들의 노력에 의해 최남주의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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